일러스트=ChatGPT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과 의료기기 기업들이 잇따라 중남미 시장에 진출했다. 중남미 인구는 약 6억7000만명에 달하는데 의약품과 의료기기 자급률이 낮아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에 좋은 시장이다. 브라질의 경우 미국, 중국과 3대 미용의료 시장으로 꼽힌다. 중남미 국가들이 자국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해 규제 벽을 낮춘 것도 한국 기업 진출을 돕고 있다.

◇파트너사와 현지 맞춤형 마케팅으로 공략

한미약품(128940)은 멕시코 제약사 실라네스(Silanes)와 수출 계약을 맺고 지난달 ‘구구탐스’를 출시했다. 구구탐스는 한미약품이 자체 개발한 비뇨기 질환 복합제로,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탐스로신과 발기부전 치료제인 타다라필을 결합한 약이다. 국내 전문의약품 최초로 한 캡슐에 여러 약효 성분을 조합한 ‘폴리캡(Poly-Cap) 기술’을 적용했다.

한미약품이 중남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건 2023년부터다. 한미약품은 현지 제약사 실라네스를 파트너로 삼고 고혈압·고지혈증 복합제 ‘아모잘탄큐’를 먼저 출시했다. 이어 2024년 고혈압 복합제 ‘아모잘탄플러스’를 중남미 시장에 선보였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북미와 일본을 넘어 중동과 중남미 등 성장 시장에서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이를 교두보로 삼아 협력 제품군을 확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는 지난 2월 범미보건기구(PAHO)로부터 자체 개발 수두백신 ‘스카이바리셀라’를 2027년까지 중남미 지역에 공급해줄 것을 사전 통지받았다. 회사는 중남미 지역의 통합 조달 기구인 PAHO의 입찰에 참여해 공급 계약을 수주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앞서 2022년 PAHO의 수두백신 입찰에서 첫 수주에 성공, 지난 3년간 안정적으로 중남미에 공급했다.

국내 제약사들은 현지 파트너 제약회사와 계약을 맺고 중남미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현지 제도를 잘 아는 데다 영업마케팅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웅제약(069620)은 2018년 처음 브라질 파트너사 목샤8(Moksha8)과 계약을 맺고 주름 개선제인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를 수출했다.

대웅제약은 지난달 목샤8과 1800억원 규모 수출 계약을 새롭게 맺었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계약보다 약 10배 늘어난 규모다. 회사에 따르면 목샤8은 나보타 현지 출시 초기에 다른 보툴리눔 톡신이 먼저 진출해 있는 피부과나 성형외과보다는 치과와 에스테틱(피부관리) 병원을 집중 공략하는 마케팅을 펼쳐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HK이노엔(195940)은 위식도역류질환 신약 ‘케이캡(현지 제품명 키캡)’으로 중남미 18국에 기술수출 또는 완제품 수출 형태로 진출했다. 회사는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17개 시장 파트너사로 ‘카르놋(Carnot)’을 택했다. HK이노엔은 카르놋과 중남미 의료진을 대상으로 학술대회를 열어 케이캡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도를 높였다.

키캡(케이캡의 중남미 현지 제품명) 콜롬비아 출시 심포지엄에서 데이비드 푸라(David A. peura) 미국 샬로츠빌 버지니아 대학교 소화기내과 명예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HK이노엔

◇규제 완화, 관세 혜택이 시장 진출에 도움

한국 의료기기 기업들의 중남미 수출도 성과가 커지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발간한 ‘의료기기 전략 품목과 시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대(對)브라질 의료기기 수출액은 2019년 6200만달러에서 2023년 1억8500만달러로 연평균 34.4% 증가했다.

피부미용 의료기기 기업 클래시스(214150)는 해외 매출 중 브라질 매출이 27%에 달한다고 밝혔다. 브라질은 중남미 지역에서 보툴리눔 톡신 소비가 가장 많을 만큼 성형, 미용시술 수요가 크다. 그만큼 브라질에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게 주변 중남미 국가 진출에 중요하다.

클래시스는 브라질 이외 중남미 국가를 대상으로 주력 제품 ‘슈링크 유니버스’, ‘볼뉴머’ 출시를 확대할 계획이다. 정형외과 임플란트 전문업체인 시지메드텍(056090)도 지난해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페루 등으로 시장을 확대했다. 정형외과 수술에서 주로 쓰는 척추·경추 고정장치와 케이지 등이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이다.

루닛(328130), 뷰노(338220), 제이엘케이(322510), 코어라인소프트(384470) 등 국내 의료용 인공지능(AI) 기업들도 일제히 중남미 국가에서 제품 인허가를 잇달아 획득하며 현지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중남미에는 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국가들이 많아 AI로 질환을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더 커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의료 규제 벽을 낮추고 있는 것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을 촉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식약청은 2023년부터 한국산 의료기기 등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멕시코는 지난 20일 새로운 GMP(우수 제조관리기준) 지침을 발표했는데, 브라질·아르헨티나·캐나다·콜롬비아·칠레·쿠바·미국 등 규제기관에서 발행한 GMP 인증을 멕시코에서도 인정하기로 했다.

관세 혜택도 유리한 조건이다. 칠레의 일반 관세율은 6%이지만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의약품 수출은 무관세 혜택을 받는다. 지난 20년간 양 지역 간 교역 규모는 4배 이상, 한국의 대(對)중남미 직접 투자액은 16배가량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