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주목받다가 임상시험 실패로 폐기된 약물이 새로운 효능을 입증했다. 알츠하이머병 치료에는 눈에 띄는 효과가 없었으나, 고위험군의 알츠하이머병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워싱턴대 의대 연구진은 20일 국제 학술지 ‘랜싯 신경학’에 스위스 로슈의 알츠하이머병 신약 후보 물질이었던 ‘간테네루맙(gantenerumab)’의 예방 효능을 시험한 임상시험 결과를 공개했다. 간테네루맙은 2022년 경증 알츠하이머병 환자 대상의 임상시험에서 치료 효능이 확인되지 않으면서 개발이 중단됐다.
간테네루맙은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과 결합하는 항체 단백질이다. 아밀로이드 베타는 원래 신경세포(뉴런)를 보호하는 단백질이지만, 세포에서 떨어져 나와 덩어리를 이루면서 신경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아밀로이드 베타 덩어리가 알츠하이머병의 직접적인 원인인지, 증상 중 하나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밀로이드 베타 덩어리가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을 유발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간테네루맙은 로슈가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로 개발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경증 알츠하이머병 환자 약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글로벌 임상 3상 시험에서 치료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환자들은 2년 동안 간테네루맙을 투약했으나 인지 기능 개선 효과가 6~8%에 그쳤다. 치료를 받지 않은 환자들과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워싱턴대 연구진은 간테네루맙이 이미 만들어진 아밀로이드 베타 덩어리는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덩어리 형성을 막을 수 있다면 알츠하이머병 예방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연구진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지는 않지만, 유전자 이상으로 뇌에서 아밀로이드 베타가 과도하게 만들어지는 사람 73명을 임상시험에 참여시켰다. 이들은 알츠하이머병 발병률이 높은 고위험군에 속한다.
임상시험은 당초 2020년부터 2023년 말까지 이뤄질 예정이었으나, 로슈가 2022년 간테네루맙의 개발을 포기하면서 2023년 중반 조기 종료했다. 하지만 그동안 임상시험에서 간테네루맙의 알츠하이머병 예방 효과가 일부 확인됐다.
특히 참가자 중 최장 기간인 8년간 간테네루맙을 투약한 그룹에서 효과가 가장 좋았다. 이 그룹에 속한 22명은 알츠하이머병 발생 확률이 최소 50%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투약 기간이 짧은 그룹에서도 알츠하이머병 예방률이 21% 정도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가족력과 유전자 분석 등에서 예측한 알츠하이머병 발병 시기가 지난 이후에도 간테네루맙을 투약한 참가자들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며 “투약 기간이 길 수록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부작용은 이전 임상시험보다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에 치명적이거나 참가자가 숨진 사례는 없으나, 참가자 2명은 부작용이 심각해 간테네루맙 투약을 중단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알츠하이머병 예방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임상시험에 알츠하이머병 고위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만 참여했으나, 다른 원인으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수 있는 사람들도 예방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랜들 베이트먼(Randall J. Bateman) 워싱턴대 명예교수는 “이번 연구와 비슷한 형태의 여러 임상시험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며 “이들 연구에서 이번처럼 긍정적인 효과가 확인된다면 알츠하이머병 예방이 가능하다는 최초의 임상적 증거를 제시한 것이 된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간테네루맙과 함께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의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후보 물질 ‘렘터네툭(remternetug)’을 이용한 알츠하이머병 예방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렘터네툭의 알츠하이머병 치료 임상3상 시험이 현재 진행 중이며 이르면 올해 내로 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Lancet Neurology(2025), DOI: https://doi.org/10.1016/S1474-4422(25)00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