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1962년 12월 7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파트’ 준공 일주일 만에 연탄가스 사고가 발생했다.(1962년 12월 8일 조선일보) 일가족 6명이 중태에 빠졌다. 피해자는 “아파트 연탄 부엌구조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아파트가 생소한 시기였는데, 마포아파트는 가뜩이나 일반적인 연탄아궁이 방식이 아닌 연탄보일러 방식을 채택했다. 국내 아파트 최초였다. 연탄보일러는 연탄아궁이보다 진일보한 기술로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 발생률을 줄여 주는데, 당시엔 생소한 탓에 사고 원인으로 꼽혔다. 이 아파트를 지은 대한주택공사는 국내 아파트사(史) 최초로 동물실험에 나섰다. 1992년 발간된 대한주택공사 30년사는 이렇게 적는다.
인체 기능과 가장 비슷하다는 기니피그 6마리를 구해 여러 방에 가둬놓고 실험을 했는데 가스 중독은 없었다. 그러나 입주자들이 인간과 기니피그는 다르다고 주장하므로 인체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장소장 등 직원들은 밤새 돌아다니면서 입주자들의 안부를 점검했고…(중략) 건축부장은 시달리다 못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인체실험을 하겠다 하여 술을 마시고 가장 가스가 많이 샌다는 방에 하룻밤 투숙을 했으나 이상은 없었다.
이후 사고 조사에서 원인은 입주자 부족으로 인한 파이프 동파로 밝혀졌다. 입주자가 적어 빈집이 많았고, 추운 날씨에 공가(空家) 쪽 파이프가 동파해 가스 배출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추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지 꽤나 위험한 실험이었다.
◇”혁명 한국의 상징 되길” 대내외 과시용 아파트
마포아파트는 정부가 근대화를 과시하기 위해 지은 아파트였다. 1962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됐고,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한 지 1년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20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가나(190달러)와 마다가스카르(130달러)보다 낮았다. 당시 항공사진을 보면 마포아파트는 마치 중세시대 성처럼 우뚝 솟은 모습이다.
마포아파트는 원래 10층으로 계획됐지만 6층으로 조정됐다. 국내외 반발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게 되자 걸어 다니기 원활한 6층으로 낮춘 것이다. 당시 미국대외원조기구(USOM)는 철근콘크리트의 고층 건물보다 난민구조주택 건설에 주력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 의사를 표했다. 국내에서도 한 건물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이 투자된다는 비판 여론이 우세했다. 결국 마포아파트는 높이를 낮춰 건설됐다. 1962년 1차로 Y자형 6개동, 450가구, 1964년 2차로 일(一)자형 4개동, 192가구가 준공됐다.
설계안이 일부 후퇴했지만 마포아파트는 당시 경제 수준에 비춰 최고급이었다. ‘마실 물도 귀한데 수세식 화장실이 가당하냐’는 반대에도 불구,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을 도입했다. 국내엔 양변기 제조업체가 없어 일본에서 양변기를 수입했다. 보기 드문 서구식 조경과 Y자형의 독특한 외형은 상징성을 부여했다. 국내 최초로 아파트 단지 주변에 담장을 설치했고, 최초로 연탄보일러를 탑재했다. 시공은 현대건설과 삼부토건 등이 맡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준공 치사에서 이 아파트가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마포아파트를 ‘혁명 한국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의식주 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다”면서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 준공은 생활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 아파트가 혁명 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고 했다. 그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며 마포아파트를 선거 포스터 배경으로 쓰기도 했다.
◇비싼 가격에 임대·분양 잘 안 돼… 영화 배경으로 나오며 인기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를 임대아파트로 공급했다. Y자형 450가구는 1962년 임대로 공급한 뒤 1967년 분양 전환했다. 일자형 192가구는 1964년 준공 때 분양했다. 임대아파트로 공급한 이유에 대해 고(故) 장동운 초대 대한주택공사 총재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경험을 가지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준공 초기엔 입주율이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대중들은 생소한 아파트 건물에 거부감을 느꼈다. 아파트가 희귀할 때라 “저렇게 높은 곳에서 어떻게 자느냐”는 걱정이 나왔다. 양변기를 보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볼기짝을 맞닿을 수 없다”는 불만이 나왔다.
또 9~16평형의 좁은 면적인데 두 달 치 월세가 대학교 등록금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마포아파트 Y자형 입주 3일 전인 1962년 11월 28일, 조선일보는 “(450가구 중) 입주 신청자가 189명이어서 절반 이상이 빈방”이라면서 “입주금과 월세가 비싼 까닭”이라고 했다. 1964년 기준 마포아파트 15평형 임대료는 보증금 5만5000원, 월 임대료 4800원이었다. 같은해 연세대학교 등록금은 8100(문과대학)~9700원(공과대학)이었다.
마포아파트는 점차 연탄가스 두려움이 해소되고 영화 촬영 무대로 등장하며 부촌으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감독 유현목, 성악가 김자경 등 중상류층이 거주했고 ‘제트부인’(1967), ‘여자가 고백할 때’(1969) 등 영화 배경으로 그려졌다. 1967년엔 약 30만원의 프리미엄(웃돈)도 붙었다. 박기석 2대 대한주택공사 총재는 대한주택공사 30년사에서 “마포아파트는 점차 생활의 편리성이 알려지며 1963년말 대부분 분양됐다”면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말쑥한 마포아파트에 얼마나 들어가 살고 싶었겠느냐”고 적었다.
◇최초의 재건축, 최초의 ‘재재건축’ 유력
마포아파트 주민들은 준공 25년차인 1987년 국내 최초로 가옥주모임(재건축추진위원회)을 설립해 재건축을 시작했다. 준공 연차가 쌓이며 낡은 아파트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마포아파트는 재건축 첫발을 뗀 지 7년 만인 1994년 삼성종합건설이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했다. 마포삼성아파트는 재건축으로 가구수가 340가구 늘었고, 평수도 기존 9~16평형에서 28~50평형으로 넓어졌다. 국내 최초 재건축 사업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마포아파트 재건축은 추진 과정에서 집주인과 세입자의 갈등이 극심했다. 400여가구 마포아파트 세입자들은 1989년 3월 대책위원회를 결성, “분양권을 달라”, “재개발은 입주권과 이사비를 주는데 재건축은 왜 안 주느냐”고 반발했다. 세입자들은 조합 측 철거반원과 물리적으로도 충돌하며 퇴거를 완강히 거부했고, 결국 명도소송에서 패소해 짐을 쌌다.
재건축된 마포삼성아파트는 ‘강북 대장주’ 자리를 꿰찼다. 준공 이듬해인 1995년 기준, 마포삼성아파트 32평형은 시세가 2억4000만원이었다. 강남권 개포경남 33평형과 값이 비슷했고 강북 최고가였다. 재건축으로 집주인과 건설사가 윈윈하며 이후 국내 재건축 시장 큰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마포삼성아파트는 아파트 최초로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해 신문기사에도 실렸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출입문이 열리게 했고, 지하주차장과 놀이터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다. 1995년 4월 6일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사무용이나 업무용 빌딩에 주로 쓰이던 무인경비시스템이 아파트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재건축 아파트인 마포삼성아파트는 지난해(1994년) 7월 아파트단지 규모로는 처음으로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마포삼성아파트는 어느덧 준공 25년이 지나 다시 낡은 아파트가 됐다. 재건축 연한(30년)을 거의 채웠다.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조합은 아직 공식 설립되지 않았는데, 국내 최초 ‘재재건축’ 아파트가 나온다면 마포삼성아파트가 유력하다.
낡은 아파트임에도 지하철 5·6호선·경의중앙선·공항철도 환승역인 공덕역 역세권이라 입지가 좋아 전용면적 84㎡(32평형)는 최고가가 16억5000만원에 달한다. 지난달 27일 단지에서 만난 마포삼성아파트 주민 강명자(80)씨는 “어릴 적 도화동 인근 용강동에서 자랐는데, 마포아파트는 당시 동네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자’며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다”면서 “마포삼성아파트엔 최근 이사 왔는데, 생각보다 많은 마포아파트 원주민들이 마포삼성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