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논의를 진행하면서 휴전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가 우크라이나 재건 프로젝트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전 문제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재건 규모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28일 관가에 따르면, 정병하 우크라이나 재건지원 정부대표는 오는 4월 2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공여자 플랫폼(UDP) 제13차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키이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어 각국·기관들이 참석자를 확정하지 않는 데다, 현재까지 의제 안건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움직임도 빠르지 않은 상황이다. 산업부는 이날 전문가·기업인들과 중앙아시아 포럼에서 러·우 전쟁 동향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논의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기업인들을 초청해 우리 기업과 사업을 연결해 주는 행사도 고려 중이지만, 시기는 ‘상반기 중’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민간단체인 한국무역협회가 26일 우크라이나 상공회의소 사절단을 만나고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것에 비해 움직임이 더딘 편이다.
우리 정부와 다른 국가들이 현재까지 우크라이나 재건 프로젝트에 소극적으로 응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휴전 직전 강한 공습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재건 사업이 기존 기대만큼 큰 규모가 아닐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당초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기반 시설을 복구하는 데 9000억달러(약 1300조원)이 들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국제기관 분석 결과 재건 비용 규모는 절반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은행이 지난 2월 발표한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 규모는 5240억 달러(약768조원), 직접 피해액은 1760억달러(약258조원) 수준이다. 휴전 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편입한다고 가정하면 계산은 달라진다.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가 집계한 우크라이나 비점령지(러시아 점령지) 직접 피해액은 895억달러(50.85%)에 달한다. 해당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될 경우, 재건 시장 규모도 큰 폭으로 줄어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재원을 안전하게 조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장기화로 재정적자가 확대된 데다, 재정 운영의 대부분을 국제 원조에 의존해 정부부채가 급증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약속했던 우크라이나 재정지원금액을 큰 폭으로 줄일 것으로 보이고, 유럽도 휴전 직후 재정지원금액을 평화군 등 군사 분야에 투입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우크라이나의 신용등급도 낮아져 자체 자금 조달은 쉽지 않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 국가 신용 등급을 선택적 디폴트(채무불이행)인 SD로 강등했고, 피치도 지난해 7월 우크라이나 신용 등급을 CC에서 C로 내려 잡았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채무불이행이나, 이와 유사한 과정이 시작됐다’고 본 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휴전 직전이지만 계속 공격이 이어지고 있어서 아직 안전하지 않아 논의를 진행하기 적절치 않다”면서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상황을 더 지켜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의 광물 협정 제안으로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의 패러다임도 변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광물 협정 펀드를 제안한 상황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천연자원과 인프라로 발생한 수익의 절반을 미국 소유의 펀드에 넣으면, 이 펀드 수익으로 우크라이나 재건과 개발 사업에 사용한다고 약속해 왔다. 유럽과 미국 위주로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이 진행되면, 우리 기업들의 설 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각국 정부는 자국 기업이 사업을 수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공적개발원조(ODA)를 주는 편인데, 2022년 기준 우리 정부의 지원 규모는 30개국 중 14위권으로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에 비해 적은 수준이라 수주 기회도 적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2026년까지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도 21억달러에 그쳐 수백억달러를 지원하는 EU나 미국과 비교하면 지원규모가 미미한 수준이다. 이때문에 EU나 미국이 수주한 사업에 공동프로젝트나 컨소시엄에 참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재건 프로젝트에 나서려면, 수익성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자원공사 관계자는 “유럽연합(EU) 중심의 ODA 지원사업과 미국 기금 주도의 개발 사업이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의 양축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우리 기업의 우크라이나 사업 수행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ODA 공여국 건설사들의 해외 경험이 부족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재건 프로젝트를 보는 시각은 갈린다. 대형 건설사는 기대만큼 수익이 없을 것으로 보는 반면, 건설기계나 교통 관련 기업은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가능성이나 수익성이 높은 상황은 아니다”라며 “우리나라 ODA 규모가 크지 않아 그에 따른 사업 기회도 적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대로템은 “종전을 해야 발주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를 기다리고 있다”며 “과거 우크라이나 수출 경험을 바탕으로 수주 기회를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을 차지할 경우, 러시아측 재건 사업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가 러시아 점령 지역에 몰려 있어 오히려 러시아 지역의 재건 사업에 기회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북·러간 군사협력이 지속되고 있는 데다 EU와 외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 또한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