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사업자 A씨는 조달청 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를 통해 장비를 구매했다. 그가 나라장터에 공고를 올린 기간은 주말을 포함해 단 3일. 긴급 공고도 최소 7일 동안 진행되는 것이 원칙인데 너무 짧았다. 단속에 나선 공무원들은 문제의 장비에 두꺼운 라벨이 붙어 있어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B업체의 장비에 물품 계약을 체결한 C업체의 라벨을 덧붙여 둔 것이었다. 이른바 ‘라벨 갈이’다.

#보조 사업자 대표 D씨는 E업체와 수의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E업체와 D씨의 주소지가 같았다. 현장 단속에 나선 공무원들이 “E업체의 주소지가 이곳인데, 어디서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관계자는 사무실 한쪽 귀퉁이를 가리킬 뿐이었다. 알고 보니 D씨의 아들이 소유한 ‘유령 회사’였다. 이밖에 D씨는 근무하지도 않는 아들·딸에게 인건비를 지급하고, 친오빠가 대표로 있는 F업체와 계약을 맺기도 했다. 보조금으로 구입이 금지된 주류도 구입했다.

지난해 500억원에 달하는 ‘부정 수급’ 국고보조금이 정부로부터 적발됐다. 국고보조금은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나 개인에게 정책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 드는 경비 일부를 지급해 주는 자금을 뜻한다. 보조 사업의 수가 원체 많고 꼼수도 다양하다 보니 누수가 많아 그동안엔 ‘눈먼 돈’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는데, 최근엔 정부가 단속을 엄격히 하고 있다.

정부가 국고보조금 부정수급과 관련한 현장점검을 통해 적발한 사례. 기존 쓰던 장비 위에 '라벨 갈이'를 한 모습이다. 실제로는 다른 업체 장비이지만, 새 장비를 구매한 것처럼 조달청 전자조달시스템 나라장터에서 계약한 업체 이름을 스티커로 덧붙여둔 것이다. /기획재정부 제공

기획재정부는 19일 김윤상 기재부 2차관 주재의 관계부처 합동 집행 점검 추진단 회의를 통해 지난해 국고보조금통합관리망(e나라도움)의 부정징후탐지시스템(SFDS)과 합동현장점검으로 적발한 보조금 부정수급 사례가 총 630건, 493억원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적발 실적은 2023년 7월부터 2024년 6월 기간에 집행된 보조 사업들을 대상으로 단속한 결과다.

이번 적발 실적은 건수 기준 ‘역대 최다’다. 2023년(493건) 대비 1.3배로 증가한 것이다. 다만 적발 금액으로는 2023년(699억8500만원)에 못 미쳤는데, 이에 대해 임영진 국고보조금부정수급관리단장은 “2023년 단속 대상인 2022년 집행 건 중 대선이 끝나고 코로나 극복을 위해 50억원 정도 추가경정예산(추경)이 편성됐는데, 이것이 워낙 급히 진행되다 보니 자격이 미달한 소상공인 등이 많이 포함됐던 등의 특수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부정수급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한 보조 사업자는 공식 입찰 경로인 조달청 나라장터가 아닌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사업자를 모집하고, 자체 내부 평가를 통해 G업체를 선정했다. 이미 G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뒤 2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형식적으로 나라장터에 입찰공고를 냈다. 게다가 G업체 대표는 보조 사업자 대표와 인척 관계였다. 둘은 5년간 이런 거래 관계를 이어오면서 보조금 39억1000만원을 부정 수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사건은 현재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다.

정부로부터 적발된 39억1000억원어치 부정수급 사례의 거래 방식. 대표가 인척 관계인 업체에 거래를 몰아주는 등의 방식이 문제가 됐다. /기획재정부 제공

국고보조금부정수급관리단은 “허위 계약, 라벨 갈이, 가족 간 거래가 전체 적발 금액의 87.4%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특정 거래 관리 및 인건비 중복 ▲계약 절차 위반 ▲집행 오·남용(심야 주점에서 보조금 카드 결제 등)의 행위가 다수 적발됐다.

이렇게 덜미가 잡힌 문제의 사업들은 소관 부처에서 부정수급심의위원회를 열고, 경찰 수사 등을 거쳐 추가 확인이 이뤄진다. 이를 통해 ‘부정수급’으로 최종 확정되면 보조금 환수와 제재 부가금 징수, 사업 수행 배제, 명단 공표 등의 조치가 이뤄진다.

정부는 올해도 보조금 부정수급 단속 활동을 더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 8079건, 510건에 달하는 부정 징후 추출 건수와 현장점검도 각각 1만건, 500건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다. 또 e나라도움의 부정징후탐지시스템을 통해 1차적으로 의심 사례를 걸러낼 수 있도록 돕는 적발 패턴 69개 유형도 학습을 통해 추후 더 늘릴 방침이다. 기재부는 “한 푼의 보조금도 낭비되지 않도록 부정의 소지를 끝까지 추적해 적발하고, 환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