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이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한국의 플랫폼 규제에 반발하는 것과 관련해 ”국익 관점에서 통상 문제로 발전하지 않도록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플랫폼 규제 움직임을 강하게 반대하는 가운데, 공정위는 통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도 정책 방향을 신중히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한 위원장은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신정부의 공정거래 정책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통상 환경 변화가 종합적으로 고려될 수 있도록 입법 과정에서 국회와 협의하고, 미국과 지속적으로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개정안 추진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지속하겠다는 점을 강조한 만큼, 규제 강도나 적용 범위가 조정되거나 개정안 시행이 일부 유보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재 공정위는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플랫폼뿐만 아니라 구글·메타 등 해외 플랫폼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시장 지배적 플랫폼의 반경쟁 행위를 사전 차단하는 규제가 도입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미국은 이 개정안이 자국 기업을 겨냥한 차별적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후보자는 지난 6일(현지시각) 상원 재무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온라인 플랫폼 규제 움직임을 두고 ”용납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무역 보복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고려아연 주식소유 현황.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공정위는 고려아연의 해외 계열사를 활용한 출자 논란과 관련해 공정거래법 적용 여부를 면밀히 살펴볼 방침이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국내 계열사 간 상호출자는 금지돼 있지만, 해외 계열사를 통한 출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공정위가 법적 판단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고려아연이 해외 계열사를 통해 국내 계열사 지분을 매입한 것이 상호출자 및 순환출자 규정을 회피한 탈법 행위인지 들여다보고 있다”며 “현재 관련 신고가 접수된 상태이며, 사실관계 확인과 자료 요청, 의견 청취 등을 거쳐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정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해외 계열사(호주 선메탈홀딩스)를 통해 국내 계열사 주식을 매입한 것으로 신고됐다. 신고인 측인 영풍·MBK는 이를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순환출자 규정을 우회한 탈법행위로 보고 있다.

현재 공정거래법 제21조(상호출자의 금지)와 제22조(순환출자의 금지)에 따르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 속한 국내 계열사 간 상호출자 및 순환출자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해외 계열사를 이용한 출자는 규제 대상인지 명확하지 않아, 국내 계열사가 해외 계열사를 거쳐 출자하는 방식은 법 적용을 피할 여지가 있다.

공정위는 해외 계열사가 개입된 경우 현행법상 규제적용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신고인 측이 공정거래법 제36조(탈법행위 금지) 위반 가능성을 제기한 만큼,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법 적용 가능성을 검토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공정위는 최근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의 대형 인수합병(M&A) 심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공정위는 미국 시높시스(Synopsys)의 앤시스(Ansys) 인수 건에 대해 국내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면밀한 심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시높시스와 앤시스는 각각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EDA) 시장 1위, 4위 업체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에 칩 설계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있다. 공정위는 이번 기업결합이 반도체 설계 시장에서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는지 검토해 이달 초 안건을 상정했다. 시높시스-앤시스 건은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된 ‘기업결합 자진 시정방안 제출제도’가 처음 적용된 사례로, 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결론이 나올 예정이다.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전경. /뉴스1

공정위는 중소 하도급업체의 대금 지급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 위원장은 “중소 하도급업체가 대금을 제때 받을 수 있도록 보호장치를 확대하는 종합 개선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공정위는 ‘하도급대금 지급 보장 강화 TF’를 구성하고 오는 25일 1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TF에는 학계, 법조계, 사업자 단체가 추천한 전문가들이 참여해 하도급대금 지급보증 면제 사유 축소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공정위는 건설업계에서 하도급대금의 일부를 유보하는 관행을 부당 특약으로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고시 개정도 추진 중이다. 지난달까지 행정예고가 완료됐고 규제개혁위원회 심사를 거쳐 다음 달부터 시행할 방침이다.

유통업계에서도 납품업체의 대금 지급 기한을 단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공정위는 티메프 사태를 계기로 온라인 중개 거래 분야의 대금 정산 기한 단축을 위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이 발의된 이후 유통업계 전반에서 지급 기한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제기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올해 실시한 유통 분야 서면 실태조사에서 백화점·홈쇼핑·온라인쇼핑몰을 포함한 139개 유통업체·납품업체 상당수가 직매입·특약 매입의 법정 대금 지급 기한(60일·40일)이 지나치게 길다고 응답했다. 이에 공정위는 백화점, TV홈쇼핑, 쇼핑몰 등 11개 업태 139개 유통브랜드·납품업체를 대상으로 서면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공정위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행 지급 기한의 적정성을 평가하고 제도 개선 필요성을 검토할 방침이다.

한편, 공정위는 온라인 광고대행업체들의 불법 행위 근절을 위해 ‘온라인 광고대행 사기 신고센터’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는 플랫폼 사업자·공공기관을 사칭한 광고 계약, 효과가 낮은 키워드 광고 유도 후 과도한 위약금 부과 등의 피해 사례가 증가한 데 따른 조치다. 공정위는 지난 11일부터 한국인터넷광고재단과 협력해 신고센터를 개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