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기 관리 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 창설자 겸 회장인 이안 브레머(Ian Bremmer)가 12·3 계엄 사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한국의 ‘협상력 열세’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2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런 정치적 혼란부터 수습해, 안정적인 지도 체제를 바탕으로 미국과 직접 외교를 수행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이안 브레머는 1998년 정치 리스크 컨설팅 회사인 유라시아그룹을 창설해, 각국의 지경학·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석하고 있다. 이 그룹은 특히 매년 1월, 향후 1년 동안 세계를 뒤흔들 주요 위험 요소들을 예측해 발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올해 글로벌 리스크 1위는 ‘G-zero’(강력한 글로벌 리더가 부재한 상태에서 국제 협력이 어려워지는 현상)를 꼽았다. 지난해엔 ‘자신과 싸우는 미국’을 꼽았는데, 두 리스크 모두 트럼프 재집권과 결부되는 현상이다.
브레머 회장은 최근 조선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대미(對美) 수입을 늘려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인상’ 압박에, 한국이 미국산 에너지, 방위 산업 제품, 농산물, 조선 관련 장비 등의 수입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다.
다만 그간 한국이 중국 무역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의존도를 높여온 점은 향후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브레머는 최근 몇 년간 한국 기업들이 미국 반도체·전기차·배터리·바이오 테크 산업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고, 그로 인해 특히 ‘레드 스테이트’(Red State·공화당 강세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시켰음을 강조하는 것이 효과적인 협상 카드가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한편 트럼프의 재집권을 줄곧 ‘전 세계적 리스크’로 꼽아 온 브레머는, 미국의 이같은 ‘정치 위기’가 한국과도 닮아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의 구호인 ‘Stop the Steal’(부정 선거를 막아라)이란 구호를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똑같이 내걸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고 이야기했다. 강경한 정치적 대립, 양당 협력 축소, 국민 불신 심화 등 양상이 당분간 한국 정치에서 지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음은 브레머 회장과의 일문일답.
―유라시아그룹은 올해 글로벌 리스크 1위로 ‘G-zero’(강력한 글로벌 리더가 부재한 상태에서 국제 질서가 혼란스러워지고 협력이 어려워지는 현상)를 꼽았다. G-zero란 개념이 생소한데.
“G-zero란 세계가 무정부 상태처럼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일컫는다. G7이나 G20 같은 국제 협의체가 더는 과거처럼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은 점점 자국 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의 외교 정책은 점점 더 거래적이고 일방주의적이 돼 가고 있다. 국제 협력과 다자주의를 지지하기는커녕, 글로벌 리더십을 제공하길 꺼리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하에서 매우 강력하고 공고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의 경찰관’, ‘자유무역의 설계자’, ‘법치주의’, ‘민주주의’, ‘공동의 가치’ 등을 옹호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중국 역시 압도적으로 자국 경제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
―‘G-zero’가 아닌 상태, 즉 국제적 협력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그렇다. 기후 변화와 인공지능(AI) 거버넌스, 안보, 금융 안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고, 공동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공동체(community of nations)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하는 일을 감내하는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first), 중국은 ‘차이나 퍼스트’(China-first)다. 그런 와중에 한국·일본·캐나다·독일·프랑스·영국 등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부는 약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나라도 리더십 공백을 메울 수 없는 상황이다.”
―G-zero를 2위 리스크로 꼽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배’(Rule of Don)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지적했는데, 왜인가.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재집권이 왜 1순위 위험이 아니었는지를 물었다. 트럼프는 엄청난 권력을 공고히 했고, 미국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많은 위험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에 타당한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트럼프는 지정학적 질서의 광범위한 붕괴의 ‘한 증상’일 뿐이다. 지난해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전례 없는 ‘집권 세력 교체 흐름’(anti-incumbency wave·현직자 반대 선거 열풍)이 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질서 붕괴의 결과를 우리는 ‘G-zero의 승리’라고 지칭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계속해서 커지는 가운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나 지도자는 없다. 현재의 지정학적 환경이 안정되거나 개선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말이다.”
―G-zero에 따른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3차 세계대전 같은 상황이다. 물론 그런 일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아직은 작다. 하지만 우리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나 냉전 초기와 유사하게 위험한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글로벌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에선 불안정성이 커지고, 분쟁이 많아지며, 경제가 단절된다. 권력 공백 속에선 불량 국가나 범죄 세력이 활개 칠 가능성이 크다. 인류가 겪는 고통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리스크에서 한국의 정치적 리스크로 시선을 좁혀보겠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한국에도 위협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관세와 방위비다. 관세 압박은 어떤 형태로 이뤄질까.
“한국과 일본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상당하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으로부터 관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완화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선제적 조치의 예로, 한국이 미국산 에너지, 방위 산업 제품, 농산물, 조선 관련 장비 등의 수입을 늘리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한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국 기업들의 미국 내 적극적인 신규 투자(그린필드 투자·공장이나 사업장을 새로 짓는 투자) 덕분에 어느 정도 유리한 입장에 있긴 하다. 다만 현재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있다.”
―혜택을 볼 수도 있을까.
“미·중 관계 악화로 중국산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산 첨단 장비에 대한 관세를 높일 경우, 그 대체재가 될 수 있는 한국산 전자제품이나 배터리, 기계, 바이오 기술 관련 제품들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
―관세와 결부해 방위비 분담 압박도 커질 것 같은데.
“미국은 한국에 관세 압박을 지렛대로 삼아,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체결된 한미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이 미국 측의 초기 압박을 완화할 완충 장치 역할을 당분간 할 수는 있겠다. (증액 압박을 지연시키거나 증액 규모를 낮출 근거로 말이다)”
―이것이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으로도 이어질까.
“미국은 ①한국이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완전히 거부할 정도로 협상이 결렬됐을 때 혹은 ②대북 협상에서 미국이 북한과의 포괄적 합의의 일부로 자국의 안보 공약을 일부 축소·재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감축을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 즉 방위비 분담금 문제만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할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방위비 분담 협상이 불발돼 군대 감축 카드가 현실화하는 것보단 일정 수준의 방위비 분담 증액이 상대적으로 덜 부담되는 선택지일 것이다. 한국은 SMA를 적극 활용하면서, 방위비 증액이 불가피할 경우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인상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책이 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한국은 대중 수출을 줄이고 대미 수출을 늘려 왔다. 이런 무역 구조 변화가 트럼프 행정부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한국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있는 점은 워싱턴 입장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대미 수출 증가보다 더 중요한 건 대미 수입을 늘려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간 한국 기업들의 대미 수출 증가는 주로 반도체·전기차·배터리 생산을 위한 중간재 공급이 많았다. 이런 미국 내 직접투자(FDI) 확대가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한국의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될 것이다.”
―트럼프 재집권으로 북한의 영향력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나.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2018~2019년 외교 국면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제안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건 김정은 위원장은 유리한 협상 위치에 있고, 트럼프와의 협상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미·북 대화가 재개되며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트럼프가 한반도에서의 미국 안보 공약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할 가능성이 있어, 한미 동맥이 약화할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한·미·일·중의 관계는 어떻게 재편될까.
“한·미·일 삼각 공조는 트럼프 집권 하에서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정치적 공백이 발생한 상황에서, 더욱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경우, 한·미·일 협력은 더욱 흔들릴 수 있다.
반면 미국과 동맹국 간의 균열은 중국에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중국은 한국·일본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강화하고 있고, 올해 한·중·일 3국 외교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언급했듯 지난해 12월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은 정치적 분열이 극심하다. 미국의 정치와 일견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동의한다. 한국의 정치 위기는 미국과 여러 가지 유사점을 보인다. 양국 모두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고, 입법은 교착 상태다.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미 트럼프 지지자들의 구호였던 ‘Stop the Steal’(부정 선거를 막아라)이란 구호를 내걸고 집회를 여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포함해 광범위한 대통령 면책 특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트럼프와 유사한 행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도 강경한 정치적 대립, 양당 간 협력 축소 그리고 지도층에 대한 국민 불신 심화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당분간 헌정 위기가 커질 것이다. 만약 야당 대표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각종 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는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선 그를 정당한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수사 요구도 거세질 것이다. 대규모 시위와 정치적 폭력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트럼프 2.0′ 시대에 한국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한국은 현재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게 시급하다. 안정적인 지도 체제를 구축해야만, 트럼프와 직접 외교를 통해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후 한국은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기 위한 선제적 조치를 마련해 트럼프의 관세 압박을 완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최근 몇 년간 미국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테크 산업에 투자한 수십억달러 규모의 금액과 그로 인해 특히 공화당 강세 지역인 레드 스테이트에서 창출된 일자리를 강조하는 것이 효과적인 협상 카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