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내년도 총지출 규모를 656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올해 예산안보다 2.8% 증가한 금액이다. 정부가 총지출 개념을 도입해 재정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역대 최저 수준’의 증가율이다. 예산안 총수입이 10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내년에도 나라 살림 사정이 좋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씀씀이를 최대한 줄인 것이다.

정부는 재정지출 증가를 최소화한 대신 23조원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해 여타 핵심 사업의 투자 여력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부정·부당의 온상으로 꼽힌 보조금과 ‘나눠 먹기 관행’이 지적된 연구개발(R&D) 예산이 주요 삭감 ‘타깃’이 됐다. 이렇게 아낀 돈은 출산·양육 지원, 생계급여 확대, 군 처우 개선, 노인 일자리 증대 등에 투입된다.

이번에 편성된 예산안이 정상적으로 집행된다고 가정하면 내년 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비율은 ‘3.9%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정부가 도입하고자 하는 재정준칙 가이드라인인 ‘3% 이내’ 목표를 지키지 못하지만, 2025년부터는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적자국채 발행량은 82조원 규모로 늘어나, 국가채무비율이 51% 수준으로 올라설 전망이다.

그래픽=정서희

◇ 총지출 증가율 반토막… 총수입 예산 10년 만의 감소

정부는 29일 국무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2024년 예산안’과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심의·의결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두 번째로 마련한 예산안이다. 내년 총지출은 656조9000억원으로 편성됐다. 올해 본예산 대비 2.8%(18조2000억원) 증가한 규모다.

내년도 총지출 증가율(2.8%)은 2005년 정부가 현 방식으로 재정 통계를 정비한 이래 가장 낮다. 역대 지출 증가율이 가장 낮았던 때로 꼽히는 2010·2016년(2.9%)보다 0.1%포인트(p) 낮은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2년 연속 재정지출 증가를 강하게 억제하고 있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 첫 예산을 짜면서 이미 증가율을 기존 8.7%에서 5.1%로 반토막 낸 바 있는데, 이를 또다시 반토막 낸 것이다.

내년도 총수입은 612조1000억원으로 추계했다. 이는 올해 본예산보다 2.2%(13조6000억원) 줄어든 것이다. 총수입 예산안이 마이너스로 책정된 것은 2014년(-0.5%)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세수 부진이 내년엔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측되는 대목이다. 총수입 중 국세 수입은 8.3%(33조1000억원) 줄어든 367조400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다만 국세 외 수입이 8.7%(19조5000억원) 증가한 244조7000억원으로 전망돼 총수입의 ‘구멍’을 메울 전망이다.

이로써 내년도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는 3.9%(92조원)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집계됐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기금을 제외하고 계산한다. 실질적인 나라 살림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다. 올해 예산안에서 짠 2.6% 적자보다 되레 적자 폭을 1.3%p 키웠다. 이는 현재 정부가 도입을 위해 국회를 설득 중인 재정준칙의 기본 원칙,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 3% 이내’를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4일 열린 사전 브리핑에서 “총지출을 동결해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이 3.2%”라며 “(건전재정 측면을 고려해) 재정지출 증가율을 동결하거나 ‘마이너스’로 가지고 가는 방안까지도 당초 검토했지만, 이 경우 필수 소요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판단돼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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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보조금 헐어 약자 복지·미래 준비에 투자

나랏돈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정부는 23조원 규모의 기존 사업 구조조정 작업을 병행했다. 지난해 2023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며 24조원의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에 이어, 올해도 대규모로 사업을 재정비한 것이다. 개별 사업 건수로는 1만개 이상이 손질 대상이 됐다.

이 중에서도 주요하게 정비된 분야는 R&D와 보조금 예산이다. 현재 R&D와 보조금 예산 규모는 각각 31조1000억원, 102조3000억원이다. 이 중 각각 7조원, 4조원 규모가 구조조정됐다. 구조조정된 사업 중에선 완전히 삭감된 것도, 다른 사업과 합쳐져 조정된 것도 있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은 여타 핵심 과제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정부는 ▲약자 복지 ▲미래 준비 ▲양질의 일자리 창출 ▲국가 본질 기능 등 4가지를 중점 투자 방향으로 설정했다. 대표적으로 생계급여 지원금이 역대 최대 수준인 13.2% 인상된다. 여기에 1조5000억원의 예산이 더 투입된다. 출산 가구에 구입·전세자금 융자 및 주택 공급 등 주거 안정을 지원하는 정책 예산은 2조1000억원 증액된다.

예산안을 분야별로 보면 ▲외교·통일(19조5000억원·19.5% 증가) ▲보건·복지·고용(242조9000억원·7.5% 증가) ▲공공질서·안전(24조3000억원·6.1% 증가)의 증액이 두드러졌다. 반면 ▲R&D(25조9000억원·16.6% 감소) ▲교육(89조7000억원·6.9% 감소)의 감소 폭은 컸다. 교육 분야는 국세 수입 감소로 여기에 자동 연동되는 지방교육교부금 배분도 덩달아 줄어든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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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국채 82兆 발행… 코로나 시기 발행량 원복

정부가 아끼고 아껴 만든 예산안을 내놓았지만, 결과적으로 쓰는 돈은 커졌고 걷는 돈은 줄어들었다. 이 차이를 메우기 위해 정부는 내년 81조8000억원의 적자국채를 발행할 계획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인 2021·2022년(86조~88조원) 찍어낸 적자국채 규모와 맞먹는다. 지난해 나랏빚을 줄이겠다며 적자국채 발행량을 45조8000억원 규모로 대폭 줄였는데 다시 원상복구된 셈이다.

이로써 정부는 내년 총 158조8000억원의 국고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적자국채 81조8000억원을 고려한 국고채 순발행 규모는 50조3000억원, 차환 발행 규모는 108조5000억원이다.

적자국채 발행량이 증가하면서 국가채무는 늘어날 전망이다. 내년도 국가채무는 1196조2000억원으로, 올해 예산안 대비 61조8000억원 증가한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51.0%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예산안 대비 0.6%p 늘어난 규모다. 지난해 중기 국가채무비율을 짜면서 목표한 50.6%보다 소폭 올려 잡았다.

정부는 2023~2027년 중기 계획을 통해 “국가채무 비율을 2027년 말까지 50%대 중반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며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비율도 2024년엔 지키지 못하지만, 2025년부터 적자 폭 3% 이내에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