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건전 재정 기조를 내년에도 이어가겠지만,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미래 준비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이 원칙은 연구개발(R&D) 예산 배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부는 나눠주기식 또는 성과가 부진한 R&D 예산을 줄이는 대신 12대 국가전략기술에는 올해보다 6.3% 증가한 5조원을 투입한다.

반도체 분야 인재를 양성할 반도체 특성화 대학은 올해 8개교에서 내년에 18개교로 늘어난다. 인력난 해소를 위한 해외 우수인력 유치 예산도 확충된다. 공공 부문 연구자들은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공공 연구기관을 고사시키겠다는 선언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8월 22일 오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정부는 주요 R&D 사업에 투입하는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13.9% 적은 21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 국가 R&D 예산이 삭감된 건 1991년 이후 처음이다. / 연합뉴스

29일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2024년도 예산안을 확정·의결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22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열어 주요 R&D 사업에 투입하는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13.9% 적은 21조5000억원으로 확정한 바 있다. 정부가 국가 R&D 예산을 삭감한 건 1991년 이후 처음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6월 28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 결과다. R&D 예산 삭감에 대해 정부는 “나눠주기식 사업이나 성과가 부진한 사업을 통폐합한 것일 뿐”이라며 “주요 전략기술 관련 지원은 오히려 강화했다”고 했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4조7000억원인 국가전략기술 R&D 예산을 내년에 5조원으로 늘린다. 인공지능(AI)·첨단바이오·양자 등 차세대 혁신 기술이 주력 산업으로 성장하는 걸 돕기 위해서다. 민간 발사장과 우주환경 시험시설 구축, 반도체 첨단 패키징과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 개발 등 글로벌 산업 생태계 주도를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flagship)도 추진한다.

국내 연구진 중심의 폐쇄적인 연구 문화는 세계적 석학과 적극적인 국제 협력 기조로 바꾼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내외 연구자 간 공동연구와 신진연구자의 해외선도연구 참여를 지원하고, 해외 유수 대학·연구소에 협력 거점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한국 기관과 보스턴 기관의 강점을 합쳐 바이오 난제를 해결하고 의사과학자 등 핵심 인력을 양성하는 ‘보스톤-코리아 프로젝트’에 864억원을 책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또 정부는 연구력이 왕성한 신진연구자의 연구 정착과 발전을 초기 단계부터 지원하기로 했다. 신진연구 지원 사업을 450개에서 8000개로 늘리고, 연구비도 연 1억5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확대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뉴스1

국가첨단전략산업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인프라·금융 지원 예산도 1조6000억원 규모에서 2조원으로 강화된다. 정부는 국가첨단전략산업 분야 중견·중소기업의 기술 실증·상용화 촉진을 돕고자 1000억원 상당의 저리 융자를 제공하기로 했다. 정부는 “기존 나눠먹기식 소액 지원 방식에서 탈피할 것”이라며 “민간 금융기관을 활용해 사업성이 높은 핵심기술 사업화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인프라 부문에서는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의 용수·전력·도로·폐수 등 핵심 기반시설 구축에 200억원을 지원한다. 이 밖에 정부는 2800억원을 들여 기업·대학이 함께하는 산업현장 맞춤형 실무 교육을 제공한다.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 등 첨단 분야 핵심 인재 육성을 위한 예산도 1조6000억원에서 1조9000억원으로 늘어난다. 이 중 반도체의 경우 특성화 대학이 올해 8개교인데, 내년에 10개교를 추가한다. 기업과 대학이 함께 운영하는 반도체 부트캠프도 올해 10곳인데 내년에 17곳이 새로 문을 연다. 신소재·클라우드·블록체인·바이오헬스·항공우주 등의 분야 혁신융합대학과 부트캠프도 확충된다.

인력난 해소를 위한 해외 우수인력 유치 예산은 10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증가한다. 이를 토대로 외국인등록증 발급을 49만5000명에서 62만2000명으로 확대한다. 외국인의 국내 조기 정착을 위한 비숙련 외국인력(E-9) 직무 훈련과 외국인 유학생 일·학습 병행제 등도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김완섭 기획재정부 2차관은 “해외 유망기업의 국내 정착을 지원하고, 개발도상국 인재의 국내 학위 과정을 확대할 것”이라며 “정부 초청 장학생도 4906명에서 6700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공공 부문 연구자들은 정부의 R&D 예산 ‘선택과 집중’ 배정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이달 25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정부의 R&D 예산 삭감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비롯한 공공 부문 연구기관을 상시적 구조조정 상태로 몰아넣고 연구 인력을 내쫓아 고사시키겠다는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과기노조는 “R&D를 둘러싼 카르텔이 있다면 부처 이기주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정부 관료, 전문성 없는 정치권과 일부 관변 과학기술자라는 것을 명심하라”며 “진정 R&D 제도 혁신을 이루려면 정부 관료 중심의 상명하달식 정책이 아니라 연구 현장 종사자의 의견과 목소리를 반영한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