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메모리반도체에 비해 글로벌 경쟁력이 취약한 우리나라의 시스템반도체 역량을 끌어 올리고자 유망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20곳을 뽑아 본격적인 국가대표 기업 육성에 나섰다. 이들 업체에 3년간 최대 20억원의 연구개발(R&D) 비용을 주고 인공지능(AI)·전력·바이오 등 한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첨단 시스템반도체 설계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사업에서 정부 지원은 설계 단계에서 그냥 끝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가 설계대로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시제품 제작, 테스트 등의 후속 단계는 예산 부족으로 지원하지 않는다. 정부는 시제품 제작을 도울 다른 사업과 연계해 유망 팹리스 지원을 이어나간다는 방침이지만, 기업들은 “글로벌 스타 팹리스를 키우겠다”던 정부 홍보에 어울리지 않는 용두사미(龍頭蛇尾) 지원책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정부는 전 세계 매출 30위권 이내의 글로벌 스타 팹리스 3개 이상을 키우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올해 2월 20일 세종시에 있는 반도체 장비 제조사 비전세미콘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는 모습. / 산업통상자원부

◇ 유망 팹리스 20곳 선발해 미래 반도체 연구 지원

5일 정부·산업계 등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스타 팹리스 후보기업’ 20개사를 선정하고 총 15건의 시스템반도체 설계 R&D 과제를 제시했다. 기업들은 스마트 TV용 음성인식 SoC(시스템온칩), 전기차용 BMS(배터리관리시스템), 객체 감지가 가능한 후방 카메라용 CIS(이미지센서), 스마트 워치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등 AI·전력·바이오 반도체와 첨단 센서 관련 연구를 자유롭게 선택해 수행하면 된다.

산업부는 20개 팹리스에 올해 연구비로 업체당 평균 9억2600만원을 제공한다. 각 팹리스는 앞으로 3년간 최대 20억원을 받는다. 이번 사업 참여를 고려했던 한 중소 팹리스 관계자는 “시스템반도체 설계는 주로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이 단계에서는 큰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소규모 팹리스 입장에서 정부 지원금 9억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라고 했다.

앞서 산업부는 작년 12월 첨단 기술 경쟁력을 보유한 라이징 스타 팹리스(창업 7년 미만) 5개 이상과 전 세계 매출 30위권 이내의 글로벌 스타 팹리스(창업 7년 이상) 3개 이상을 키우겠다는 목표가 담긴 ‘글로벌 스타 팹리스30 후보기업 선정 추진계획’을 국내 반도체 업계에 전달했다. 이후 ‘서면→심층→종합’의 3단계 평가 과정을 거쳐 20개 팹리스를 국가대표 후보로 뽑았다.

그래픽=손민균

산업부는 스타 팹리스 후보기업에 대한 혜택으로 정부 지원 R&D 비용 가운데 민간 부담금 비율(중소기업 기준)을 기존 33%에서 20%로 낮추고, 민간 부담금 중 현금 부담 비율은 기존 40%에서 10%로 완화한다고 밝혔다. 또 시스템반도체 선도국인 미국과 공동연구에도 이들 팹리스를 연계하겠다고 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산하 시스템반도체설계지원센터에 있는 반도체 설계 자동화(EDA) 툴과 계측장비 등도 지원된다.

정부가 팹리스 생태계 강화에 나서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글로벌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우리나라 시스템반도체의 역량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의 시스템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1년 기준 3.0%에 불과하다. 3.6%였던 2015년과 비교하면 되레 0.6%포인트(P) 추락했다. 글로벌 50대 팹리스 중 국내 기업은 LX세미콘 한 곳이 유일하다.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1년 기준 3.0%에 불과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3월 28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있는 전력 반도체 기업 울프스피드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 예산 한계로 정작 중요한 시제품 제작·테스트는 지원 불가

문제는 산업부가 글로벌 스타 팹리스30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확보한 올해 예산이 139억6600만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산업부는 20개 스타 팹리스 후보기업에 “반도체 설계까지만 지원한다. 비용이 다소 크게 발생하는 시제품 제작과 테스트는 기술 개발 성과가 우수한 과제를 대상으로 별도 사업을 통해 연계 지원할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설계에 이어 시제품 제작과 테스트까지 정부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업체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전(全) 주기로 보면 ‘설계(팹리스)-제조(파운드리)-조립(후공정)’으로 이어진다. 시제품 제작과 테스트는 설계에서 제조로 넘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이 단계에서 설계 보완과 테스트가 숱하게 반복돼서다.

상당수 국내 중소 팹리스는 시제품 제작에 필요한 투자금과 파운드리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사진은 카이스트(KAIST) 연구진이 3월 14일 정부세종청사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지능형 반도체를 시연하는 모습. / 연합뉴스

한 중소 팹리스 고위 관계자는 “국내 많은 중소 팹리스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시제품 제작과 테스트에 필요한 투자금과 시제품을 만들어줄 파운드리를 확보하는 일”이라며 “경기 둔화로 민간 투자가 얼어붙은 요즘 같은 시기에는 정부 지원이 절실한데, 기왕 ‘글로벌 스타’를 양성한다고 했으면 시제품 제작·테스트와 파운드리 섭외까지 지원 범위에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기업성장환경 조성 사업, 시스템반도체 수요연계 온라인플랫폼 지원 사업 등 기업의 시제품 제작을 도울 수 있는 정부 사업이 따로 존재한다”며 “뛰어난 반도체 설계가 시제품으로 탄생하도록 타 사업과 적극 연계하겠다”고 했다. 올해 기업성장환경 조성 사업 예산은 63억8000만원, 시스템반도체 수요연계 온라인플랫폼 지원 사업 예산은 75억5000만원이다.

시제품 제작을 도울 타 사업과 연계하겠다는 정부 설명에도 기업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 한 팹리스 관계자는 “솔직히 연도가 바뀌고 경기 흐름이 바뀌고 (정부) 담당자가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