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차전지와 디스플레이를 반도체처럼 국가의 미래 먹거리로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정작 두 산업 경쟁력의 핵심인 석·박사급 전문인력 육성 스케줄은 너무 느슨하게 잡아 업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 등 후발주자가 치고 올라오면서 각국 경쟁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인데, 전문가를 키울 사관학교 역할을 할 특성화대학원 설립은 예산 문제를 이유로 내년쯤 한두 곳만 시범 지정할 계획이어서다. 정부가 국가 경제의 명운이 걸린 첨단산업 분야 인력 확보에 진심을 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직원이 LG디스플레이의 중소형 8인치 360도 폴더블 OLED를 선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 尹 “과학기술 인재 키워야” 당부했지만…느슨한 석·박사 육성 스케줄

20일 관계부처와 정보기술(IT) 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한 이차전지와 디스플레이의 특성화대학원 1~2곳을 2024년 중 시범 운영하기로 했다. 두 분야와 함께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된 반도체의 특성화대학원은 올해 상반기 중 3곳을 선정하고, 하반기부터 수업에 착수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반도체가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커 (특성화대학원을) 우선 선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 정부는 작년 11월 4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제1차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를 열어 3대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를 발표하고, 이와 관련한 15개 첨단전략기술을 선정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 시행을 계기로 공급망 등 경제안보상 중요성, 연관 산업에 미치는 효과, 대규모 투자 계획에 따른 입지와 인력 양성 등 정부 지원의 시급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3대 국가첨단전략산업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는 “국가첨단전략산업의 석·박사급 전문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고자 세부 기술분야별 특성화대학원을 지정해 중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특성화대학원 3곳을 통해 반도체 분야 석·박사 인재 5000명을 키워내겠다고 했다. 이후 정부는 전국 대학을 대상으로 선정 절차에 착수했고, 올해 3월 초 신청서 접수를 마감했다. 10개 넘는 대학이 반도체특성화대학원 지정을 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022년 11월 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1차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산업통상자원부

하지만 정부는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석·박사급 전문인력 부족을 호소 중인 이차전지와 디스플레이 관련 특성화대학원 설립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에서 언급한 ‘2024년 1~2개 대학원 시범 지정’도 확정된 스케줄은 아니다. 관련 예산 확보가 보장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차전지·디스플레이 특성화대학원 지정에 관한 건 예산 당국과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예산에 가로막힌 이차전지·디스플레이 전문인력 육성은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강조하는 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중요성과도 온도 차를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일 경북 구미 금오공과대에서 진행된 제1차 인재양성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4차 산업혁명과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국가가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뛰어난 과학기술 인재를 많이 길러 내는 것”이라며 “시급성, 중요성, 우리의 비교우위 경쟁력을 고려해 집중적으로 인재를 양성할 핵심 분야를 설정하고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월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국가첨단산업벨트 추진계획 발표를 듣고 있다. / 연합뉴스

◇ 굼뜬 韓 정부 보란 듯 치고 올라오는 中 기업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사이 산업계의 위기의식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차전지와 디스플레이 모두 중국 등 경쟁국의 견제와 추격이 매우 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가 작년 1~10월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사용량 기준)을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2위 LG에너지솔루션은 13.8%, 3위 중국 BYD는 13.2%를 각각 기록했다. 2020년까지만 해도 16%포인트(P) 이상이던 점유율 격차가 확 좁혀진 것이다.

성장세를 비교해보면 한국 이차전지 업계의 위기감은 더 잘 드러난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최근 1년간 LG에너지솔루션은 16.1%, SK온은 83.2%, 삼성SDI는 69% 성장했다. 같은 기간 중국 CATL은 98.6%, BYD는 171.4%, CALB는 172.7%, 궈쉬안은 142%, 신왕다는 345.2% 성장했다. 중국 이차전지 업계는 수직계열화와 탄탄한 소재 공급망, 강력한 정부 지원 등을 토대로 글로벌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가고 있다.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사 BOE의 연구원이 TFT-LCD(박막트랜지스터 액정 화면) 기술을 점검하고 있다. / 조선 DB

긴장감 흐르는 분위기는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와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은 33.2%로 중국(41.5%)에 추월당했다. 2004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정상에 선 이후 17년 만의 역전이었다. 2014년까지 300억달러를 웃돌던 우리나라의 디스플레이 수출액도 2021년 214억달러로 주저앉았다.

전문가들은 정부도 기업만큼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면서 인재 육성 등 지원책 마련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반도체보다 디스플레이에서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더 빠른 게 현실이다”라며 “국영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BOE 등 중국 업체와의 경쟁에서 국내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세제 혜택은 물론 석·박사급 전문인력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