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국가 안보 자산이자 우리 산업의 핵심”이라고 말한 윤석열 대통령이 현행 6~10% 수준인 대기업의 반도체 기술 관련 시설투자 세액 공제율을 8~12%로 상향 조정한다. 반도체와 더불어 국가전략기술에 포함되는 배터리와 백신 기술도 같은 혜택을 받는다. 민간 기업의 투자 활동을 장려해 우리나라 경제안보 분야 핵심 기술의 국제 경쟁력을 사수하고, 고물가-고금리 복합 위기를 맞이한 우리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첨단 분야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관련 학과 정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다른 나라보다 세율이 높고 구조도 복잡한 법인세 제도도 손질한다. 윤 정부는 현 4단계인 과표 구간을 단순화하는 동시에 25% 수준인 최고세율을 22%로 낮춰 기업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또 양도‧상속‧증여 시점까지 상속세 납부를 유예해주는 제도를 신설해 가업 승계 활성화도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가업 승계가 세대 간 기술·자본 이전의 지름길이라는 판단에서다. 기업 사내유보금(미환류 소득)에 세금을 매기는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는 아예 없앤다. “법인세에 더해 이중 과세하는 지나친 정책”이라는 재계 의견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5월 20일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대기업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 최대 2배 상향

정부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새정부 경제정책방향’을 확정·발표했다. 정부는 이번 경제정책방향에서 민간·기업·시장의 자유와 창의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조세·형벌 등의 규정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한다고 밝혔다.

우선 정부는 국가 경제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국가전략기술에 대한 투자 인센티브와 세제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현재 국가가 지정한 국가전략기술은 반도체·배터리·백신 등 3대 분야 34개 기술이다. 정부는 현행 6~10% 수준인 대기업의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 세액 공제율을 중견기업 혜택 수준인 8~12%로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중소기업의 시설투자 세액 공제율은 16~20%다.

정부가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로 지정된 업종의 대기업 투자세액 공제율을 높이기로 한 것은 투자 효과 극대화라는 목표 때문이다. 조(兆) 단위 비용이 들어가는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분야의 대규모 시설 투자 여력이 있는 곳은 대기업에 국한된다는 게 현실이다. 정부는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기업의 국내 시설투자 확대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이런 기대감을 드러내듯 정부는 국가전략기술 중 반도체 기술을 현 20개에서 대폭 확대해 나가겠다고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국가전략기술의 세부 기술을 추가 지정하는 건 시행령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며 “업계와 소통하면서 수시로 기업 니즈에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런 정책 방향성은 연일 반도체 산업 육성에 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윤 대통령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윤 대통령은 이달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례적으로 반도체 특강을 열었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 출신인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이 강사로 나서 ‘반도체의 이해 및 전략적 가치’를 주제로 20분가량 발표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첫 일정으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시민이 LG디스플레이의 투명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담긴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의 대체불가토큰(NFT) 작품 '인류의 중요한 기억'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 OLED 세제 지원도 확대

이번 경제정책방향에서 정부는 반도체뿐 아니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대한 세제 지원도 확대하겠다고 전했다. 다만 디스플레이 업계가 희망하는 OLED의 국가전략기술 포함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국가전략기술보다는 세제 혜택이 적은 신성장·원천기술 범주에서 OLED 발전을 돕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고광효 기획재정부 조세총괄정책관은 “국가전략기술은 경제안보 차원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전략 분야를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탄생한 것”이라며 “(국가전략기술 지정은)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정부는 현재 2조원+α 규모인 설비투자 특별자금의 지원 범위와 규모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오는 8월 4일 시행되는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상 국가첨단전략기술을 지원 범위에 추가할 방침이다. 설비투자 특별자금의 운용 기간도 2023년에서 2025년으로 연장한다. 개별 운영 중인 고용 관련 세제 지원 제도의 경우 ‘통합고용세액공제’로 개편해 지원 체계를 일원화한다는 계획이다.

6월 15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가운데)가 '반도체 산업의 동향과 반도체 인재 수요'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반도체 등 첨단분야 학과 정원 획기적 확대

정부는 교육 개혁에 관한 부분도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 인재 육성에 초점을 맞췄다. 매년 대졸 이상 반도체 전문 인력이 1600명 이상 필요한데, 실제 졸업생 수는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실정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는 “현장 수요를 반영한 혁신 인재 양성이 가능하도록 교육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전환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우선 반도체 등 첨단분야의 인력 양성을 저해하는 규제 개선에 착수하고, 올해 하반기 중 첨단분야 정원의 획기적 확대를 위한 추가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대학규제개선위원회(가칭)를 설치해 대학 관련 법령·지침을 전면 재검토한 뒤 신규 개선 과제를 발굴하고, 획일적 대학평가를 자율계획에 따른 선(先) 재정지원-후(後) 성과관리로 개편하는 것도 연내 정부가 추진하는 일이다. 현재 고등학교까지만 해당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지원 범위를 고등교육으로 확대해 대학의 자율적인 혁신을 뒷받침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지역 내 산업·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적시에 공급하기 위해 지방·전문대, 직업계고에 대한 지원 체계와 교육 과정도 손질한다. 또 범부처 차원의 신산업 인재 양성 협업체계를 구축하고, 제도 개선과 재정 지원을 포괄하는 첨단분야 인력 양성 대책을 올해 안에 수립하기로 했다.

정부의 이런 교육 시스템 개혁은 윤 대통령이 최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분야 인재 양성에 굼뜬 정부 행태를 강도 높게 질책한 데 따른 것으로도 보인다. 윤 대통령은 교육 주무부처인 교육부를 향해 “교육부는 개혁과 혁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교육부 스스로 경제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교육부가 성장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면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과학기술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손민균

◇ “투자촉진세제 지나치다” 재계 호소에…정부, 폐지로 화답

이밖에 정부는 법인세·배당소득과세·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 등의 정비도 예고했다. 국가전략기술 혜택 강화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투자·고용 창출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눈에 띄는 부분은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를 아예 없애기로 한 것이다.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는 투자·임금·상생 등의 분야로 지출하지 않은 일정 당기소득에 법인세 20%를 추가 과세하는 세금이다. 한국에만 존재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달 13일 발표한 ‘2022년 조세제도 개선과제 건의문’을 통해 이 세제가 정책 효과 없이 세금 부담만 늘리고 있다며 “유례를 찾기 힘든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상의 건의를 받아들인 정부는 “유인 체계의 실효성, 국제 기준 등을 고려해 해당 제도를 폐지한다”고 했다.

법인세의 경우 국제적인 조세 경쟁 상황을 고려해 현 4단계인 과표 구간을 단순화하고, 25% 수준인 최고세율을 22%로 인하하기로 했다. 법인의 이중과세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내국법인이 국내외 자회사로부터 받는 배당금의 익금 불산입률도 조정한다. 이월결손금의 경우 팬데믹 등에 따른 기업의 결손부담을 낮추기 위해 공제 한도를 일반법인 사업연도 소득의 60%에서 80%로 상향 조정하기로 했다. 중소기업은 현재 최고 우대 수준인 100%를 유지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16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 기업성장센터에서 열린 새정부 경제정책방향 발표 회의에 입장하며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세대 간 기술·자본 이전 촉진을 위한 가업 승계 활성화에도 나선다. 정부는 일정 요건을 갖춘 가업 승계 상속인을 대상으로 양도‧상속‧증여 시점까지 상속세 납부를 유예해주는 제도를 신설하고, 대상 기업 매출액 기준을 4000억원에서 1조원으로 2배 이상 확대하기로 했다. 사전 가업 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한도도 가업상속공제 수준으로 확대해 생전 가업 승계를 장려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더불어 국내 중소‧벤처기업을 민간 중심 성장의 핵심축으로 키우기 위한 정책도 추진된다. 연구개발(R&D) 재정 지원을 고성장 기업에 관한 스케일업 지원 중심으로 개편하고, ‘타업종 전환 + 업종 추가 시’에만 인정해주던 사업 전환 인정 범위를 ‘동일 업종 내 신사업 전환’으로 확대한다.

역동적인 벤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조치로는 창업 준비부터 사업화까지 지원하는 ‘창업중심대학’을 늘리고,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활성화한다는 계획이다.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행사 이익에 대한 비과세 한도는 현 5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늘어난다. 벤처기업의 우수 인재 확보를 도우려는 조치다. 이밖에 정부는 인수합병(M&A)·기업공개(IPO) 관련 규제 개선을 통해 투자회수 시장의 활성화를 꾀하고, 유망 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 강화와 창업가의 재도전·재기를 돕는 프로그램 도입 등도 검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