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무너진 국내 원자력발전 생태계 복구를 선언한 윤석열 정부가 출범 후 처음 확정한 경제정책방향에서도 그 의지를 드러냈다. 윤 정부는 전 정권 시절 국제사회에 선언한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차질없이 이행하겠다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문 정부의 NDC 달성 방식은 폐기하겠다고 했다. 2030년까지 24%로 설정된 원전 비중을 30%대로 확대하고, 신재생 비중은 20%대로 낮추는 방안이 유력하다. 에너지 믹스를 신재생 위주에서 원전 중심으로 전면 수정해 탄소중립과 원전 산업 재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또 정부는 지속 가능한 기업 활동의 필수 요건으로 자리매김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생태계 지원에도 나선다. 당장 다음달 ESG 공시제도 정비와 ESG 채권 발행 활성화, ESG 민간 평가기관 가이던스 마련 등이 담긴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을 내놓는다.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대상 사업 규모를 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확대하고 패스트 트랙(Fast-Track)을 허용해 신속한 R&D 프로젝트 수행 여건도 조성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16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제2테크노밸리 기업성장센터에서 열린 새정부 경제정책방향 발표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원전 비중 확대 예고…30% 이상 제시할 듯

정부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새정부 경제정책방향’을 확정, 발표했다. 정부는 “미래 구조 전환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크게 과학기술·R&D 혁신, 첨단 전략산업 육성, 탄소중립·기후위기 대응 등의 측면에서 문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 방향성을 드러냈다.

전 정권과 특히 다른 모습을 보인 부문은 탄소중립·기후위기 대응에 관한 전략이다. 정부는 “기존에 발표한 NDC는 차질없이 이행하되 감축 경로와 이행수단 등은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2030년까지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는 문 정부의 이 선언이 국내 산업계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약속이긴 하나 국제사회에 내뱉은 말인 만큼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NDC 달성의 방법론은 문 정부와 다르다.

문 정부는 2030년 NDC 이행을 위한 에너지 믹스로 신재생 30%, 원자력 24%를 제시했다.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은 이 조합으로는 10년도 채 남지 않은 2030년 안에 NDC를 달성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신재생의 낮은 발전효율 때문이다. 올해 2월 기준 국내 신재생 설비는 15.55기가와트(GW)로 원전의 60% 수준인데, 발전량은 원전의 15%에 불과하다.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75개 풍력발전소의 발전효율은 선진국의 24%, 태양광 이용률은 14%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2월 29일 경북 울진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방문해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 정부는 이번 경제정책방향에서 “NDC 이행이 가능하도록 원전 활용도 제고 등을 통해 에너지 믹스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그간 멈춰있던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조속히 재개하고, 운영허가가 만료되는 원전의 계속운전 등으로 원전 비중을 늘리겠다고 했다. 재생에너지의 경우 주민 수용성에 기반해 보급을 지속하되 비중은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에너지 믹스의 구체적인 숫자까지 밝히진 않았으나, 원전 비중을 30~35%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많은 에너지 전문가가 윤 정부에 ‘원전 비중 최소 30% 이상’을 2030년 NDC 달성의 전제조건으로 조언해왔기 때문이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4월 14일 열린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전체 에너지 믹스 중 35%를 원전이 담당하면 신재생 발전 비중은 20%대로 완화해도 NDC 달성이 가능하다”고 했다.

정부는 “산업계·이해당사자와 충분히 소통하고 비용 등을 분석해 중장기 NDC 달성을 위한 부문별·연도별 대책과 기후변화 적응 대책 등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내년 3월까지 마련하겠다”며 “비용 효율적 감축 수단인 배출권 거래제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배출권 총량과 할당 방식 등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래픽=손민균

◇ 7월에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 발표

정부는 탄소중립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된 만큼 기업의 탄소중립 투자와 저탄소 소비 활성화에 관한 인센티브도 마련했다. 우선 기업의 탄소중립 관련 투자에 대한 재정·금융 지원을 강화하고, 감축 목표 달성 여부에 따라 후속 사업을 지원하는 ‘성과 연동 사업 방식’의 확산을 추진할 계획이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는 민간 기업의 친환경 활동 이용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탄소중립 실천포인트를 확대하기로 했다.

순환경제·ESG 생태계 조성 등 환경과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도 속도를 낸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중 폐플라스틱이나 유기성 폐기물 재활용에 관한 혁신모델 개발에 나서고, 사용 후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활성화 방안도 마련한다.

또 오는 7월에는 7대 중점과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마련해 ‘ESG 인프라 고도화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7대 중점과제는 ▲ESG 공시제도 정비 ▲중소·중견기업 ESG 지원 ▲ESG 채권 발행·투자 활성화 ▲ESG 민간 평가기관 가이던스 마련 ▲ESG 정보플랫폼 구축 ▲ESG 전문인력 양성 ▲공공기관의 ESG 선도 등이다. 정부는 “글로벌 ESG 공시 표준화 동향에 맞춰 국내 공시제도를 정비하고, 정보 접근성을 제고하기 위해 ESG 종합 정보 플랫폼을 구축할 것”이라고 했다.

한 연구원이 웨이퍼 위에 작업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 추진”

국가의 미래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중요한 과학기술·R&D 혁신과 관련해서는 오는 11월 중 제5차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핵심은 국가가 당면한 문제 해결과 신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정부 주도를 강조한 전 정권과 달리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하는 시스템을 짜겠다고 한 점,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략성을 강화하겠다고 한 점 등이 눈에 띈다. 정부는 “경제·외교·안보 관점의 대체불가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국가전략기술육성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략기술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국가·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메가프로젝트(인공지능·디지털전환 등), 초격차 기술 확보(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등에 R&D 투자 역량을 집중시키겠다고 했다. 신속한 R&D 프로젝트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R&D 예타 대상 사업 규모를 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확대하고 패스트 트랙을 허용한다. 또 첨단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해 우주·양자·감염병 등 대규모 재원이 소요되는 분야의 ‘국제 협력 R&D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R&D 투자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첨단산업 육성에도 역량을 집결한다. 정부는 올해 말 경제관계장관회의 상정을 목표로 신산업 육성 전략을 수립하고, 반도체 등 경제안보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기술·생산 역량 확충과 기업 성장 지원을 위한 ‘국가첨단전략산업 기본계획’을 마련해 연내 첨단전략산업위원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또 정부는 올해 말에서 내년 초쯤 ‘미래유망 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인공지능·바이오·모빌리티·우주·로봇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유망산업 인프라 구축에도 나선다.

차세대 원자로 개발, 수출 산업화 지원 등 미래 먹거리로서 원전 산업 육성에도 속도를 낸다. 정부는 주요 예비품 선발주 등 일감 조기 창출을 통해 국내 원전 산업 생태계 회복을 돕고,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을 목표로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혁신형 소형원자로(SMR), 4세대 원자로, 원전 연계 수소 생산 등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미래 유망 기술 개발에도 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