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시행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첨단산업특별법)’이 당초 입법 취지와 다르게 변질해 산업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이 법의 출발점이 반도체라 초반에는 ‘반도체 특별법’으로 불렸는데, 어느 순간 법 명칭에서도 반도체란 단어가 빠졌다. 대기업 특혜 불가, 무역 마찰 우려 등의 논리가 끼어들어 ‘반도체 집중 지원’이라는 명분을 무력화했다. 대학 정원 확대 등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원하는 내용도 지방 균형 발전 논리에 막혀 누락됐다. 법의 혜택 범주에 반도체 외 다른 산업을 추가하려는 부처와 이를 저지하려는 부처 간 기싸움도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분위기는 연일 우리나라 경제안보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윤석열 대통령 행보에 배치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례적으로 반도체 특강을 개최하는가 하면, 지난달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는 첫 번째 일정으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부터 방문할 정도로 반도체 강국 유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업계에서는 “첨단산업특별법이 애초 취지대로 반도체 지원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각 부처와 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특혜 시비 피하려다 누더기 된 반도체 특별법
10일 경제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기획재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주요 경제부처는 오는 8월 4일 시행되는 첨단산업특별법의 대상 산업·기술 분야를 설정하는 문제를 두고 엇갈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산업부는 이 법이 첨단산업 전반을 다루는 만큼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미래차 등 국가적 투자와 지원이 필요한 산업을 여럿 담으려고 한다. 반면 기재부는 특별법 대상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지원의 집중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재정 관리 측면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첨단산업특별법은 국가 경제안보와 수출·고용 등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국가첨단전략기술을 집중적으로 보호·육성하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 시절 마련됐다. 이 법 대상에 포함된 첨단산업은 국가로부터 시설 투자와 세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법 시행 이후인 올해 10월 기술조정위원회를 열어 첨단산업특별법 대상 산업과 기술을 구체화할 방침이다.
문제는 지금의 첨단산업특별법이 당초 입법 취지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는 점이다. 정부·업계 관계자들은 습관적으로 이 법을 ‘반도체 특별법’이라고 부른다. 처음에 정부가 반도체를 염두에 두고 밑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을 다듬는 과정에서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 일부 반도체 대기업이 혜택을 독점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자 정부는 법 조항에 반도체 산업이라는 문구 대신 ‘국가첨단전략산업’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정부 일각에선 반도체 산업 하나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행위가 국제 통상 환경에서 무역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 심사 과정에서 산업부가 이 같은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첨단산업특별법이 완성되고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간절히 기대한 인력 양성에 관한 내용은 빠져 ‘속 빈 강정’이란 비난을 받았다. 업계는 이 법에 수도권 대학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와 주 52시간 규제 완화 등을 넣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내용이 수도권 대학 정원 자율화의 전면 실시로 읽힐 수 있다는 교육부 규제의 틀을 넘지 못한 것이다. 특별법에 인재 양성에 관한 내용이 담기긴 했으나 기업이 자금을 대 만드는 반도체 계약학과, 인력 양성 프로그램 등 겉핥기에 그쳤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주요 첨단산업이 반도체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건 맞지만, 첨단산업특별법 마련 과정을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다”며 “정부가 여러 산업을 지원하려고 욕심을 내기보다는 경제안보의 측면에서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던 최초 입법 목적에 집중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는 “특별법이 차질없이 시행될 수 있도록 정부 간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했다.
◇ “반도체, 국방처럼 국가 생존 관점서 접근해야”
누더기가 된 첨단산업특별법과 달리 윤석열 대통령은 연일 반도체 산업 육성에 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달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례적으로 반도체 특강을 열었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 출신인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이 강사로 나서 ‘반도체의 이해 및 전략적 가치’를 주제로 20분가량 발표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무위원 모두 첨단산업 생태계가 반도체를 중심으로 어떻게 구성됐는지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첫 일정으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두 정상은 삼성전자가 조만간 양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했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세계 최대 파운드리를 보유한 평택(공장)을 가장 먼저 방문한 것은 안보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없단 점을 세계에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 인재 양성에 굼뜬 정부 행태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업계 불만을 달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교육 주무부처인 교육부를 향해 “교육부는 개혁과 혁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교육부 스스로 경제부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교육부가 성장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면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과학기술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반도체 경쟁국인 대만은 매년 1만 명의 반도체 인재 확보를 목표로 반도체 학과 정원 규제를 대대적으로 풀고, 대학에는 1년에 두 번씩 신입생을 뽑을 수 있는 특혜를 줬다. 반면 한국은 매년 대졸 이상 반도체 전문 인력이 1600명 이상 필요한데, 실제 졸업생 수는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첨단산업특별법은 단순히 미래 산업을 키우려고 만든 게 아니라 국가의 경제안보를 사수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며 “국방과 마찬가지로 국가 생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