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서방 강국들이 러시아 은행들을 스위프트(SWIFT, 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 차단하는 강력한 제재안을 내놓으면서, 반도체와 자동차 등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현실화 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해,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컴퓨터, 통신장비 등의 수출을 통제하면서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도 영향권에 들어가게 됐다. 이에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對 러시아 금융 제재에 대한 모니터링과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 러시아 수출 통제에 동참하기 위해, 다음달 초 미국과의 협의가 남아있는 만큼 제재 규모에 따라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수출 규제를 받지 않는 완제품이라도 전략물자인지, 비전략물자인지 구분에 따라, 수출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 미중 갈등에 이어 미러 갈등까지 글로벌 공급망 교란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높고, 수입한 원자재를 가공해 수출하는 한국의 무역구조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2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칩을 들어보이며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 韓, 러 제재 국제공조 참여... 전략물자 여부 관건

28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앞서 미 상무부는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제한 정책 FDPR을 발표했다. FDPR은 미국 밖의 외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제조 과정에서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장비나 소프트웨어, 설계를 사용했을 경우,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강력한 제재 조항이다.

규제 강도는 전략물자와 비전략물자 중 어느 부분이 해당되는 지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은 군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에 대해서는 대(對) 러시아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또 비전략물자에 대해서는 수출 가능여부를 상무부에 허가를 받도록 했다. 비전략물자는 미 측이 독자통제하는 저사양 품목 57종이다. 전자(반도체), 컴퓨터, 정보통신, 센서·레이저, 항법·항공전자, 해양, 항공우주 등이 포함된다.

문제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소비재 제품인 스마트폰은 비전략물자로서 수출 규제를 받지 않는다. 다만, 고성능 애플리케이션(반도체)을 탑재하고 있다는 점과 러시아에서 스마트폰을 수입한 뒤, 군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물자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만약 스마트폰이 전략물자로 판단된다면 러시아의 스마트폰 수출길이 막힐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한국의 다 러시아 전체 수출 규모는 99억8300만달러(약 12조464억원)다. 전체 수출액 중 1.5% 규모다. 이 가운데 스마트폰을 포함한 무선통신기기 규모는 전체의 0.4% 수준인 약 4300만달러다. 삼성의 스마트폰은 지난해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전체의 28%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 및 부품 산업도 수출 규제 우려가 나오고 있다. 두 분야 모두 군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전략물자 유지가 관건이 될 수 있다. 정부도 스마트폰과 자동차·부품의 FDPR 적용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관계자는 “FDPR에 스위프트까지 규제가 적용됐지만, 수출 규제 품목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다. 향후 미국과의 수출 규제 협희에서 범위를 구체화하는데 노력할 방침”이라며 “디지털 제품에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은 제품이 거의 없는 만큼, FDPR의 적용 범위가 중요해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반도체, 공급망 직격탄... “네온·크립톤 대체선 마련해야”

가장 직접적인 규제 피해를 받게 되는 업종은 반도체 산업이다.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네온·크립톤·제논(크세논) 등 희귀가스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네온 사용량의 70%, 크립톤의 40%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다. 네온의 경우 주 생산국이 우크라이나, 러시아, 미국, 중국, 프랑스 5개국에 불과하다.

지난 22일(현지시간) 친(親)러시아 반군이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 탱크 한대가 진입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날 친러 분리주의자들이 결성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고 평화유지를 명분으로 자국군에 이 지역 진입을 명령했다. /연합뉴스

산업부에 따르면, 네온은 수입액 23%를 우크라이나로부터, 5%를 러시아로부터 공급 받고 있다. 크립톤은 지난해 전체 수입 물량의 30.7%를 우크라이나에서, 17.5%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네온은 반도체 패턴 형성을 위한 레이저 발진에 쓰이고, 크립톤은 회로도를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는 식각 공정에 쓰인다.

이번 스위프트 제재로 인해 물량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고공행진 중인 가격도 문제다. 반도체용 특수가스 업계에 따르면, 네온가스의 가격은 이미 전년 대비 200%까지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4~2015년 크림반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네온가스 가격은 10배 이상 상승한 바 있다.

한 반도체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들이 네온 가스 재고를 3개월치 확보해 둔 만큼, 단기적으로는 수급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사태가 장기화 될 경우, 수급차질의 가능성도 발생할 수 있다. 재고 확보를 최대한 해두고 대체 수입 경로를 뚫어야 한다. 정부가 특수가스 통관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지원에 당장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車산업도 피해... FDPR 범위를 줄여라

러시아에 공장은 둔 현대차도 비상이 걸렸다. 현대차·기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 23만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현대차·기아차는 러시아 시장서 국민차 ‘라다’ 를꺾고 점유율 1위에 오른 바 있다. 가뜩이나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글로벌 완성차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악재가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텍셋을 인용해 “소재 수급 차질로 반도체 가격이 인상될 요인이 추가됐다”며 “완성차업계가 그동안 재고 관리로 6개월가량은 버틸 수 있겠지만 앞으로 상황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차 러시아 생산법인 의장라인에서 차량을 생산하는 모습. /현대차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 품목 중 자동차와 차량 부품이 각각 25.5%와 15.1%를 차지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할 당시 경제제재로 인한 루블화 가치 하락은 우리나라의 대 러시아 수출에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당시 자동차 수출은 24억500만달러에서 2015년 9억1100만달러로 62.1% 줄었고, 자동차 부품 역시 13억8800만달러에서 8억3800만달러로 39.6% 감소했다.

또 러시아에 대한 스위프트 결제망 배제로 루블화 가치 하락이 현실화한 점도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날 루블 대비 달러 환율(루블화 가치와 반대)은 직전장 종가 83.64루블보다 28.77% 치솟은 118루블로 거래되고 있다. 러시아 루블의 화폐가치가 30%가량 떨어졌다는 의미다. 특히 스위프트 배제로 대금 결제가 지연이나 중단될 경우 현지 공장 가동은 사실상 중단될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이 경우 현대차에 부품을 수출하는 관련 기업들까지 연쇄 타격이 우려된다.

여기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번 사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스마트폰, TV, 가전제품, IT 부품 등 수출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미국과의 제재 수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반도체 설계기술이 적용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탑재한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 수출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또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인 TV와 냉장고 역시 수출 제재에 포함될지 여부에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민간 소비재 완제품으로 분류되는 품목의 경우 미국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반도체 모듈 등의 부품이나 완제품이더라도 미국이 ‘거래우려자 목록’에 올린 대상과 거래하는 경우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현재로선 큰 카테고리가 발표됐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의 수출이 금지되는지는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