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행정이 단 한 번이라도 입법을 이긴 적 있나요.”
5일 만난 한 기획재정부 공무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가상자산 소득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며 세법까지 고쳤던 정치권이 지금은 태도를 180도 바꿔 과세 시기를 미루자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과세는) 유예되겠죠.”
가상자산 과세를 둘러싼 정치권과 기재부의 신경전이 팽팽하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자산을 기타소득으로 분류해 2022년부터 소득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가상자산 투자자는 내년 1월부터 연 250만원을 초과하는 가상자산 투자 소득에 대해 20%의 세금을 내야 한다.
과세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정치권은 과세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정책위의장은 이달 2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당에서 (과세를) 연기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현재 정부는 원안을 사수하겠다는 입장인데, 조만간 당·정 또는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추진 방향을 밝히고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인들은 가상자산의 개념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과세에 앞서 가상자산 업권법부터 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재부는 예정대로 과세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6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가상자산 과세를) 조정 또는 유예하는 건 법적 안정성이나 정책의 신뢰성 측면에서 어렵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장관이 목소리를 내긴 했으나, 기재부 내에서는 이번에도 정치권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 기재부 직원은 “심지어는 여야가 한목소리를 낸다. 가상자산 과세는 예정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고 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아주 익숙한 흐름이다. 데자뷔(기시감·旣視感)다”라고 했다.
실제로 기재부가 정치권에 휘둘리는 풍경은 낯이 익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연례행사가 된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대표적인 사례다. 재정 당국인 기재부가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하다가도 대통령 한마디에 허겁지겁 추경을 편성하는 일이 반복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던 작년 2월 홍 부총리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추경 편성 가능성에 대해 “1월 말은 예산안 잉크도 마르기 전인데 추경 논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얼마 후 문 대통령이 추경 편성을 지시하자 그는 페이스북에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조선비즈가 작년 초 기재부 등 7개 경제부처 과장(서기관)급 관료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기재부 과장급 응답자 35명 가운데 20명이 자신의 역할을 ‘수비수·서포터스(57%)’라고 했다. 기재부 과장들 사이에서 경제 정책이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정치 논리에 휘둘린다는 인식이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였다. 한 기재부 관료는 “이제는 딱히 부글부글 끓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는다”며 “그냥 맡은 일 하다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덮는 거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