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에 대해 세액공제율을 2배 이상 늘리기로 했다. 대기업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의 공제율도 최대 40%까지 10%포인트(P) 상향된다. 중견·중소기업의 공제율을 감안한다면 R&D는 최대 50%까지, 시설투자는 최대 20%(증가분 포함)까지 세액공제를 확대한다.

또 정부는 차량용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8인치 파운드리 증설 등을 위한 1조원 이상의 ‘반도체 등 설비투자 특별자금’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업계가 요구했던 환경규제 완화에 대해서도 화학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신속처리 패스트트랙 도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전세계적으로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발생하고, 글로벌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금기시되던 대기업에 세제지원 카드가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13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정부는 2030년까지 510조원 이상의 민간투자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를 유지하겠다는 목표다. 초격차는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비교 불가한 절대적 기술 우위를 통해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差)’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내부 모습

◇반도체 등 핵심전략기술 신설...대기업 시설투자 세액공제 2배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기업들의 유동자산 투자에 최소 1% 이상 세액 공제를 제공하는 통합 투자세액공제 제도에 핵심전략기술 지원 항목을 신설했다. 핵신전략기술에 속하는 기업의 시설투자나 연구개발(R&D) 투자는 일반 기술이나 신성장·원천기술 등 현행 제도보다 더 큰 세제 혜택을 준다. 앞서 반도체업계는 “R&D와 제조설비 투자비용의 최대 50%를 세액공제해 달라”고 건의한 바 있다.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르면 정부는 기업의 연구·인력 개발비 또는 사업시설 투자 비용에 일정 비율(공제율)을 곱한 금액을 세금에서 감면해준다. 특히 디지털·그린 뉴딜 등 새로운 산업의 기반이 되는 신성장 원천기술 관련 투자에 대해서는 일반 투자보다 높은 기본 공제율을 적용한다. 여기에 핵심전략기술을 신설해 세제 인센티브를 대폭 확대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핵심전략기술에는 우선 반도체가 포함됐고, 향후에 추가 대상산업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일반 기술의 시설투자는 대기업 기준 공제율이 1%에 그치지만, 신성장 원천기술 투자의 경우 대기업은 투자 비용의 최대 3%, 중견기업 5%, 중소기업 12%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또 직전 3년 평균 투자액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3%의 추가 공제 혜택도 제공한다.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 기준표 /기획재정부

하지만 핵심전략기술에 적용될 경우, 대기업의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은 6%로 2배 증가한다. 중견기업은 8%, 중소기업은 16%까지 공제를 받을 수 있다. 또 초과 투자액에 대해서는 1%P 늘린 4% 추가 공제혜택을 제공한다.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도 최대 10%P 상향된다. 그간 일반 R&D 투자라면 대기업 기준 공제율이 2%에 그쳤다. 하지만 신성장 원천기술 투자의 경우 대기업·중견기업은 투자 비용의 최대 30%(추가 공제율 10% 포함), 중소기업은 최대 40%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핵심전략기술 분야의 경우 대기업, 중견기업은 최대 40%, 중소기업은 최대 50%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번 지원방안을 통해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는 SK하이닉스(000660)와 평택에 시스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현행 제도에 비해 세제지원이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행 투자세액공제 제도에서 반도체 산업은 신성장·원천기술로 분류돼 대기업에 지원되는 3%의 투자세액 공제를 제공받았다. 이번 지원방안대로 세법이 개정될 경우 세액공제율은 6% 이상으로 올라간다. 대기업에 대해 이같이 파격적인 세금 지원 방안이 나온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처음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그간 정부가 ‘특정 대기업은 지원할 수 없다’, ‘반도체는 알아서 잘하겠지’ 등의 선입견으로 기업에 대한 정책 지원이 중견, 중소기업에 집중됐다”며 “전 세계적인 반도체 경쟁에 정부가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다. 이번 대책으로 중소기업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세제 혜택이 적었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에 정부 정책 지원이 제공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익노 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디스플레이과 과장은 “이번 대책을 통해 반도체 수출액은 작년 기준 992억 달러에서 2030년 2000억 달러로, 생산은 149조원에서 320조원으로 각각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를 통해 27만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정책이 실효성과 속도감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면밀히 운영·관리하겠다”고 했다.

◇8인치 반도체에도 1조원 투입...수요기업 매칭 투자도

수급난을 겪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와 관련해, 최첨단 선단 공정을 비롯해 8인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에 대한 투자계획도 발표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주로 8인치 웨이퍼 공장에서 생산된다. 8인치 웨이퍼 공장은 12인치 웨이퍼 공장과 비교해 구식 설비다.

따라서 반도체 기업들이 굳이 옛날 방식의 시설을 늘리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공장을 채울 수 있는 반도체 장비도 대부분 단종된 상태여서, 장비를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에 정부는 8인치 파운드리 생산공정 육성과 장비 국산화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8인치 기반의 파운드리 증설과 소·부·장 및 첨단 패키징 기업 신규투자 촉진을 위해 금융 프로그램 지원 등을 위해 반도체 업계의 투자 프로젝트가 구체화되는 대로 3년 간 총 ‘1조원+α'의 설비투자 특별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지난달 총 9개 기업에서 약 2조원 이상의 투자 의향을 내비쳤다.

정부는 투자 의향을 내비친 기업 중에 선정해 투자자금을 지원할 방침이다. 5년 거치, 15년 분할상환으로 1.0%p 금리를 우대 감면 해줄 방침이다.

또 정부는 기업들의 투자를 활성화 하기 위해 수요기업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실리콘(Si) 대비 높은 전력 내구성과 효율성을 보유한 신소재인 실리콘카바이드 기반의 차세대 차량용 전력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수요 대기업과 연계한 투자 지원을 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중소 파운드리 업체들이 투자를 본격 추진할 수 있도록 사업재편 정책금융 특례도 제공할 계획이다.

한 반도체학과 교수는 “중견 반도체 업체들 입장에서는 일시적인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구형 기술인 8인치 생산설비를 증설한다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만약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업체의 차량용 반도체를 사용하겠다는 수요를 확인한다면, 투자 결정이 더욱 빨라질 수 있다”고 했다.

◇법인세는 상향, 탄소중립은 발목...정부의 엇박자 정책은 발목

다만 일각에서는 법인세율 상향과 규제 등 정부의 반(反) 대기업 정서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급 문제가 불거지자 급하게 땜질식 처방을 내놓는 게 아니라 기업들의 투자 등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장기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법인세율 인상과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이 있다.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법인세 인상 공약에 따라 2018년 법인세 최고세율을 22%(지방세 포함 시 24.2%)에서 25%(27.5%)로 올렸다. 36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지난 10년 동안(2010년 대비 2019년) 법인세 최고세율(지방세 포함)을 올린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9개국뿐이었다. 20개국이 법인세를 내렸고, 7개국은 유지했다.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016년까지 OECD 평균보다 낮았지만 지금은 OECD 평균보다 높아졌다.

또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도 기업들이 투자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는 넷제로를 선언했다. 넷제로는 온실가스 배출량과 제거량이 상쇄돼 순배출량이 ‘0’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기업들은 탄소중립이 어렵다며 정부에 하소연 하는 상황이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12일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탄소중립에 대해서는)생각보다 어려워하는 기업들이 좀 더 많이 있는 게 현실”이라며 “코로나 이후에 경제도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탄소중립에 대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산업부 장관에 직접적으로 언급한 점에 대해 이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의 탈원전 에너지 정책과도 연결돼 있다. 정부가 이미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석탄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전력 공급 불안, 전기료 인상 등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저(低)탄소 에너지원인 원자력의 비중을 낮추면 정부가 내세운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마저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원전과 신재생 에너지를 병행해야 경제적인 타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전력 수급 안정성을 유지하고 탄소중립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다”면서 “실현 가능한 탄소중립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