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증외상센터’라는 K-드라마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에서 대규모 재난으로 수많은 중증 환자가 동시에 발생하자, 모든 환자들이 서로 살려달라고 소리치지만 주인공인 의사는 냉정하게 환자들을 빠르게 분류하는 내용이 있다.

의료계에서는 ‘트리아지(triage)’라는 분류체계가 존재한다. ‘분류’라는 뜻을 지닌 트리아지는 응급상황 시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환자 분류체계다.

1800년대 프랑스 나폴레옹 제국 친위대 소속 외과의사였던 도미니크장 라레가 도입한 개념으로 전쟁이나 대형 재난, 각종 사고로 갑자기 많은 환자가 동시에 발생하면 한정된 의료진과 장비로 모든 환자를 동시에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우선순위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릴 수 있었던 환자는 치료도 전혀 못 받고, 오히려 가망 없는 환자한테 시간을 허비하다가 희생자만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도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트리아지가 존재한다. 벤처캐피털들이 일년에 평균적으로 3000~5000개의 스타트업 IR 자료를 받는데, 투자심사 인원과 시간의 제약으로 이렇게 많은 회사를 모두 검토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검토 우선순위를 정해 놓는다. 그 기준에 따라 100개 정도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10~20개의 기업에 투자를 진행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투자금액이 대폭 감소한 혹한기에 철저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면 신규 투자보다는 기존에 투자했던 기업 중에서 실적이 좋고 위험성이 낮아 보이는 회사, 큰 금액이 필요한 시리즈 C 이상의 후기 투자보다는 적은 금액이 투입되는 유망한 초기 스타트업, 첨단 하이테크보다는 현금흐름이 좋고 안정된 회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기간 내에 엑시트 가능성이 높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돈을 기존 투자 포트폴리오 상위 10~20%에 집중하고, 가급적 신규 투자는 절제하지만 투자를 하게 되면 주로 초기 기업이 대상이 된다.

투자업계의 트리아지에서 가장 중요한 불문율은 ‘이미 투자한 금액의 많고 적음’이 기준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들어간 돈이 너무 커서 포기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계속 투자하게 되는 매몰비용의 오류에 빠지면, 투자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놓치고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릴 패는 과감히 버리고 승자에게만 집중하는 것이다. 스타트업계에서도 더 이상 ‘대마불사’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의 투자는 시제품 출시, 특허 취득, 시장점유율, 성장률, 해외진출 등을 고려해 시리즈 A, B, C, D, E, F, G 등으로 나누고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투자가 지속된다는 것은 스타트업이 잘 성장해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후기 시리즈로 갈수록 기업가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가령 한 회사가 시리즈 A에서 10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투자를 유치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다시 시리즈 B 투자를 받을 가능성도 높아지고, 기업가치도 시리즈 A보다 커지게 된다. 시리즈 B로 인한 성과가 나타나면 또다시 시리즈 C로 넘어가면서 밸류에이션이 높아진다. 이러한 사이클은 회사가 엑시트를 하거나 치명적인 문제로 투자가 중단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최근 투자시장에서 시리즈 개념은 많이 희미해지는 분위기다. 비즈니스의 성장 단계를 시리즈A, B, C, D 등 획일적 기준으로 구분하기 어려워진 흐름에 기인한다. 과거 비즈니스는 산업별 특징과 경계가 뚜렷했다. 가령 제조업의 경우 시제품 개발 단계는 시리즈A, 양산단계는 시리즈B, 해외 진출 단계는 시리즈C 등 성장 단계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즈니스 형태와 단계를 구분하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 빅블러(Big blur) 시대이며, 제조와 유통이 혼합되고, 유통과 금융이 합쳐지는 혼합형 비즈니스모델과 플랫폼기업이 대세인 상황에서 회사의 성장단계를 과거의 잣대로 획일화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투자(early stage)’와 ‘후기 투자(later stage)’로 통칭하는 분위기다.

얼마 전 ‘우린 폭망했다(We Crashed)’라는 제목의 흥미진진한 기업 드라마 한 편이 공개됐다. 기업가치 470억달러를 인정받으며 미국에서 가장 비싼 스타트업으로 칭송받던 세계최대의 공유오피스 기업인 위워크(WeWork)의 창업과 성장 그리고 몰락을 그리고 있다.

위워크의 급성장의 배경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무려 20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감행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회장이 있었다. 엄청난 투자금을 바탕으로 위워크는 무리할 정도로 공격적 확장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빠른 팽창 속에는 막대한 적자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IPO는 무산되었고 위워크의 기업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천신만고 끝에 2021년 말 소프트뱅크가 투자했던 기업가치의 5분의 1도 안 되는 90억 달러로 우회상장은 하였으나, 거듭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불과 2년 만인 2023년 11월 주가가 상장 후 99.96%나 떨어진 83센트를 기록한 상태에서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천문학적 투자를 했던 손회장은 무려 137억달러의 손실을 입으며 역사상 가장 최악의 투자라는 오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타트업의 가장 큰 실패원인은 자금부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폭망한 위워크의 사례는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가 스타트업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빠르게 성장한 스타트업이 몸집이 커진 상태에서 궤도를 이탈하면 가속도가 붙어서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이를 블리츠페일링(Blitzfailing)이라 한다.

블리츠페일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갑자기 나타난다.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유니콘기업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 직전이라는 소식을 알리는 이유다. 그래서 스타트업의 풍부한 자금은 빠르게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스타트업의 성공은 신과의 게임에서 이기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정성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신께서 얼마든지 승자의 자리를 양보해주시라 믿는다. 오늘도 혁신과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스타트업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