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50위권의 한 대기업 사장은 이달 초 급하게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이 회사는 프랑스, 일본 기업과 유럽 고객을 놓고 경쟁하는데, 유럽 고객이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해 발주 물량을 줄였기 때문이다.
이 유럽 고객은 1년에 두 번, 연초와 여름에 대규모 발주를 한다. 이번에 수주 물량이 줄면 한 해 영업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된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치 상황과 상관없이 공장 가동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급하게 출장을 잡았다. 리스크(위험 요인)를 줄여야 하는 유럽 고객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요즘 한국 경제의 최대 위험 요인은 정치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인 한국에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 국정 운영이 어려워진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줄곧 그래왔다. 투표자는 총선에서 대통령과 반대인 쪽에 힘을 실어주면서 견제와 타협을 기대했으나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비상계엄에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에도 타협하지 않는 두 정당은 한국 기업과 한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국회가 제 기능을 못 하면서 기업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수입 항공기 부품에 대한 관세를 올해부터 2029년까지 전액 면제해 주는 법안은 작년 말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법안이 바뀌지 않으면 올해부터 매년 20%포인트씩 감면율이 삭감돼 2029년부터는 면세 혜택이 모두 사라진다. 이 경우 민간 항공사가 향후 10년간 부담할 금액은 약 7800억원이다.
투자 세액 공제율을 높이고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세법 개정안 논의도 중단됐다. 여야는 작년 11월에 44개 세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했으나 더불어민주당이 감액예산안을 일방 처리하면서 의원 발의 법안은 모두 무산됐다. 여야는 1월에 논의하기로 협의했으나 추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44개 세법 개정안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연구개발(R&D) 시설 투자 공제율을 현행 1%에서 20%로 높이는 안이 있다. 공제율이 높아지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중소·중견기업의 임시투자세액공제 적용 기한을 늘리는 안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기업 부담은 커진다.
한국은행은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3%로 동결했다. 경제 상황만 보면 금리를 낮춰야 하지만, 정치 불안으로 환율이 오르자 환율 안정이 우선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정치 리스크로 환율이 달러당 30원 올랐다고 봤다. 정치가 불안정한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금리로 대출 이자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정권 창출이 최대 목표인 야당은 현 정부가 잘되도록 호응해 줄 이유가 없다. 선거에서 잘 먹히는 구호 중 하나는 ‘못 살겠다, 바꿔보자’이다. 야당은 국민의 삶이 팍팍해져야 다음 선거에서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이번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로 1987년에 도입된 5년 단임 대통령제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이 많다. 정치 원로들은 조기 대선이 이뤄지면 개헌 논의도 함께 하자고 제언한다. 정치 구조를 바꾸는 논의를 시작하면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도 논의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를 담보로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민들도 누가 우리 경제를 망치는지 잘 기억해 뒀다가 투표로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