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칩 정책의 일환으로 비미국계 반도체 기업을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가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 반도체 제조업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텔의 부진이 거듭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는 TSMC를 상대로 인텔과의 파트너십을 사실상 강압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칩 제조 능력을 보유한 대만 입장에서는 TSMC의 기술을 순순히 미국에 넘겨주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지만, 중국과의 갈등과 군사적 충돌 가능성 등 지정학적 변수가 있는 만큼 결국 미국과의 절충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18일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 정권은 미국 내 최첨단 반도체 공장 설립 확대를 위해 TSMC와 인텔의 협력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TSMC가 일본, 유럽 합작 법인을 설립했듯이 인텔과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인텔 파운드리의 지분을 인수한다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우선 전문가들은 TSMC의 인텔 인수 가능성은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문준호 삼성증권 연구원은 “TSMC의 인텔 공장 인수는 반독점 이슈가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며 “현재 5나노(nm·10억분의 1m) 이하 선단 공정 양산이 가능한 업체는 TSMC, 인텔, 삼성전자 세 곳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2024년 3분기 기준 TSMC의 매출 점유율은 65%(순수 파운드리 기준) 수준에 달한다. 인텔은 내부 파운드리 물량을 반영할 경우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 2위 업체에 등극한다고 밝혀왔다. 이를 감안하면 양사의 합산 점유율은 약 70%에 달하게 된다.
다만 합작법인 설립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현재 인텔의 재무상황을 고려하면 신규 투자를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텔은 이미 지난 실적 발표 때 2025년 설비투자 계획을 하향조정한 바 있다. 문 연구원은 “TSMC 역시 애리조나 팹 1기 투자의 양산 지연 배경으로 본사와 현지 인력 간 문화 차이가 대두되어 왔다”며 “인텔 인력과의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기하고 있다. 우선 미 정부의 주재로 TSMC와 인텔이 기술 협력을 맺어 최첨단 양산 기술을 공유하는 방안이다. TSMC의 강점은 선단 공정 시장 내 독과점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우려로 인해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대만의 지정학적 약점을 이용해 반도체 기술을 미국에 유치하는 것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일각에서는 TSMC가 인텔 패키징 사업과 전략적인 제휴를 체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사실상 TSMC가 인텔에 패키징 주문을 일부 다시 하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업계 관계자는 “TSMC가 대만이나 미국 OSAT 업체들과 협업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나마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며 “다만 인텔 파운드리가 필요한 최선단 공정 확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어중간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만 여론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 대만 출신 투자 애널리스트 양잉차오(楊應超) 커클랜드 캐피털 회장은 대만 현지 매체에 “TSMC가 (인텔 등과 함께) 반도체 제조 공장을 설립하는 것은 사업적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라며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양안관계 등을 감안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밝혔다. 이어 “TSMC와 미국 기업의 기술 협력이 이뤄질 경우 대만이 파운드리 사업의 패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