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3년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연합뉴스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일성으로 유명한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7일로 30주년을 맞이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전 세계 삼성 임직원들을 향한 그의 일침은 오늘날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밑거름이 됐다.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아 지난해 회장으로 취임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행보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8개월간 대규모 반도체 투자와 디스플레이 분야 인수합병(M&A), 신규 생산라인 확장 등을 이끌고 있지만 선대회장과 달리 아직 경영자로서 자신만의 메시지나 경영원칙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적은 없다.

특히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반도체, 가전, 디스플레이 외에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꼽을 사업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은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자동차용 전지, LED(발광다이오드),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태양전지에 대한 투자를 단행했고, 모든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삼성전자 미래 연 이건희 정신 되살려야”

7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부로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30주년을 맞이했다. 당시 세탁기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것을 보고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며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한 바 있다. 1995년에는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하며 근본적인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양(量)을 중시하던 기존의 경영 관행에서 벗어나 질(質)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은 올해 별다른 행사 없이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엔 기념행사를 열거나 사내방송 등을 통해 기념했지만, 이재용 회장 체제로 전환한 데다 과거 이벤트보다는 글로벌 복합위기 상황에서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용 체제의 삼성전자는 현재 전 세계적인 수요 침체와 반도체 적자 극복이라는 지상 과제가 있는 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내부 결속 다지기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95.5% 급감한 6402억원에 그쳤다. 특히 반도체 부문은 4조5800억원의 적자를 내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갈수록 격화하며 사업적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은 혁신에 도전했던 인물이고 신경영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미래를 열었다”면서 “현재의 삼성은 안타깝게도 관리의 기업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미래보다는 현재에 급급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런 어려운 시기에 신경영과 같은 도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건희 회장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투자 시동 건 이재용, 향후 과제는 新먹거리 발굴

이재용 회장은 지난 2012년 부회장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나섰다. 이후 2016년 등기이사를 맡으며 책임경영을 강화했지만 이후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경영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러다 지난해 회장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재용 시대의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면 미래를 위한 대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빠르고 민첩한 의사결정에 힘입어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5월 반도체, 바이오, 신성장 IT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히고, 글로벌 산업구조 개편을 선도하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기업’을 선언했다. 삼성은 2026년까지 5년간 국내 360조원을 포함해 45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비전 2030 달성을 위해 시스템 반도체 투자도 기존 133조원에서 171조원으로 확대했다. 2042년까지 총 300조원을 들여 용인에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할 계획이다. 또 차세대 통신, AI, 로봇, 슈퍼컴 등 미래 신기술에 대한 R&D를 강화해 4차 산업혁명 선도를 추진한다.

국가대표 기업이라는 삼성의 대내외적인 이미지 재고를 위한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020년 12월 ‘더 크고 강한 기업’을 넘어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기업가로서의 ‘꿈’을 밝히기도 했다. 준법문화 정착, 산업 생태계와의 소통 확대 및 지원, 임직원 자부심 및 국민 신뢰도를 높여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고 언급했다.

물론 과제도 산적해 있다.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 지위 유지는 물론, 팹리스(반도체 설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도 글로벌 1위로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주력 매출 품목인 D램 부문에서 마이크론, SK하이닉스 등 경쟁사들과의 기술 격차가 좁혀져 있는 상태다.

이동통신 분야에서도 5G(5세대 이동통신)에 이어 6G(6세대 이동통신) 기술에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6G 선행기술 연구를 진행 중이다. 바이오 역시 미래 유망 사업으로 꼽힌다. 이 회장은 지난해 말 삼성바이오로직스 제4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며 각별한 애정을 보인 바 있다. 배터리 사업도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초격차 기술 개발과 더불어 미래 삼성을 책임질 인수·합병(M&A)도 필요하다. 삼성전자는 로봇, 차량용 반도체, 반도체 후공정, AI 등의 분야에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M&A 리스트를 놓고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M&A는 시황 변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시스템 반도체를 비롯해 사업적 시너지 측면에서 유리한 신사업을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