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 부지. /삼성전자 제공

미국 정부가 반도체 생산 지원금을 받는 기업을 선정하는 조건으로 미국의 국가안보 이익 증진을 최우선으로 두고 기업의 초과 이익 공유, 재무 건정성 검증 등을 내걸었다. 민간 기업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붙으면서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005930)와 신설 준비 중인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고심이 깊어졌다. 미국의 중국 배제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사업 비중이 작지 않은 국내 반도체 업계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 美 경제·안보와 사업의 상업성, 재무 건전성 확인

미국 상무부는 28일(현지시각) 반도체법에 따른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절차를 안내하며 기업이 고려해야 할 6개 심사 기준을 밝혔다. 가장 큰 비중을 두는 건 미국의 경제·안보 목표 달성이다. 상무부는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의미 있는 수준으로 늘리고, 세계 공급망을 강화하는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상무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을 키우는 사업을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예시로 국방부 등 국가안보 기관에 반도체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사업을 들었다.

다른 심사 기준으로는 사업의 상업성이 언급됐다. 기업이 지속적인 투자와 업그레이드를 통해 공장을 장기간 운영할 수 있는지를 들여다볼 계획이다.

또 사업의 예상 현금 흐름과 수익성 지표를 보고 재무 건전성을 검증한다. 사업이 기술적으로 타당한지, 환경 등 관련 규제를 통과할 수 있는지 등 공장 설립 준비 상태도 확인하기로 했다.

경제적 약자 채용 계획도 제출받는다. 기업이 직원들의 숙련도와 다양성 확보에 힘써야 한다는 의도다. 여기에 지원금 1억5000만달러(약 2000억원) 이상을 신청하면 공장 직원과 건설 노동자에 보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마지막으로 상무부는 지역 사회 공헌과 미래 투자 의지 등도 확인하겠다고 했다. 여기에는 미국산 건설 자재 사용도 포함된다.

이밖에 상무부는 기업들이 세금을 낭비하지 않도록 자금 사용을 엄격히 감시하겠다고 했다. 이에 기업은 지원금을 배당급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면 안 되고, 지원금 1억5000만달러 이상을 받는 기업은 수익과 현금 흐름이 전망치를 초과하는 경우 미국 정부와 초과분 일부를 공유해야 한다. 상무부는 “전망치가 크게(significantly) 초과하는 경우만 이에 해당하며 공유분은 지원금의 75%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사업에 따라 초과 이익 공유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예외 조건을 달았다.

미 상무부는 보조금 한도를 따로 두지 않았으나, 설비투자액의 5~15% 수준일 것이라고 밝혔다. 지원은 직접적인 보조금과 대출, 대출 보증 등의 형태로 이뤄진다. 상무부는 “보조금과 대출 등을 포함한 총 지원액은 전체 설비투자액의 35%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가드레일 세부 규정은 향후 발표… 작년 10월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연장선

이날 나온 보조금 심사 기준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경우 10년간 중국 투자가 제한되는 반도체법 ‘가드레일’ 조항의 세부 규정과는 별개다. 상무부는 이 세부 규정은 향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발표된 미 반도체법 가드레일 조항에 따르면, 미국의 보조금 등을 받은 수혜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등 우려국 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 28㎚(나노미터·10억분의 1m) 미만 첨단 기술 관련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진출한 분야인 메모리 반도체와 패키징(후공정)에 대한 투자 규제는 미 상무부가 향후 2년 이내에 별도 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다만 상무부는 이날 “중국 등과 공동 연구 또는 기술 라이센스를 진행하면 지원금 전액을 반환해야 하며 10년간 우려국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가 금지된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업계는 가드레일 조항의 세부 규정이 작년 10월 7일 발표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통제와 비슷한 수준에서 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 기업들, 美·中 사이 부담 가중… “협상에 결과 달려”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와 10년간 중국 투자를 금지하는 가드레일 조항에 더해 미국의 안보를 강조한 지급 심사 기준이 나오면서 기업들의 부담은 커졌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껴 각국과의 협의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미국 보조금 신청을 안 할 수도 없고, 중국에서 생산시설을 쉽게 철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기업들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도 미국 내 반도체 패키징 공장 신설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지원금을 신청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상무부는 이날도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 사업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기조를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전체 출하량의 약 40%를, SK하이닉스는 D램의 약 50%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중국 공장 시설 고도화가 막혀 공정 전환이 어려워지면 장기적인 사업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기업이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보조금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심사에서 우선순위가 되는 기준이기 때문에 향후 미 상무부와 기업이 벌이는 협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금 당장 나온 기준에 따라 결론을 단정짓기보다는 기준을 꼼꼼히 따져본 뒤 신청 과정에서 상무부와 계속 협의해 나갈 전망”이라며 “조항별로 예외 조건을 두고 있는 것도 많아, 이런 부분은 모두 협상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가드레일 세부 규정 마련 과정에서 우리 기업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미 관계당국과 계속 협의할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