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체외진단기기 업체인 A사는 얼마 전 진단키트 업체인 B사로 이직한 직원을 상대로 법원에 전직(轉職)금지 등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올해 초까지 멕시코 법인장을 지낸 이 직원은 A사에서 11년가량 근무한 허리급 직원으로 통한다. 그런 핵심 직원이 퇴사하면서 사내에서는 한동안 적잖은 파장이 일었다고 한다.
이 직원은 사직서를 낼 때 일정 기간 경쟁업체에 취업하지 않는 ‘경업(競業)금지 약정’을 체결했지만, 퇴직 후 곧바로 이직했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두고 “코로나19 전만 해도 국내 진단기기 업계에서는 타 회사 사람은 빼 가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며 “시장이 커지자 ‘신사협정’도 깨졌다”고 전했다. A사 관계자는 가처분 소송에 대해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켜달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 신사업 관련 핵심 인력 빨아들이는 대기업
10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를 계기로 바이오산업이 주목받자 롯데·신세계·GS·두산 등 대기업이 핵심인력을 빨아들이며 인력 이동이 확산되고 있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인력이동이 너무 빈번해 인사팀 업무가 폭증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몸값 우선’ 문화로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대리, 과장급 직장인뿐만 아니라 핵심 인력까지 인력이동이 확산되는 것이다.
당장 롯데그룹이 신성장 동력으로 바이오를 점찍으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삼성바이오로직스 주요 인력들이 롯데지주로 대거 이직을 했다. 2021년 8월 롯데지주 신성장2 팀장으로 영입된 이원직 상무는 미국 UC버클리 분자세포생물학과 출신으로 삼성바이오에서만 10년 넘게 일한 핵심 인력이다.
이 상무는 삼성바이오에 있을 때 위탁생산개발(CDMO) 진출을 위한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했다. 롯데가 올해 1월 영입한 품질관리(QC) 및 품질보증(QA) 직원도 삼성바이오에서 같은 업무를 했다. 롯데는 최근 특허청에 롯데바이오로직스로 상표 출원도 한 상태다.
대기업들이 핵심 인력을 경쟁 업체에서 빼 가는 것은 기존 사업영역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진출하려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더욱이 신약 개발은 전문가 육성에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물질 발굴에서 상품화까지 아무리 짧아도 10여 년의 기간이 걸린다. 개발된 신약은 20~30년의 특허가 붙고, 가격 결정은 정부 통제를 받는다.
헤드헌팅 업체인 커리어케어 송현순 부사장(헬스케어본부 본부장)은 “코로나 이후에 제약·바이오산업이 주목을 받다 보니 업계 내의 인력 전쟁이 심화되고 있다”며 “바이오산업에 진출하겠다는 회사는 많은데, 인재 육성은 그에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송 부사장은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은 신약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 인력은 물론이고 마케팅까지 전문가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며 “지금은 의욕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좀 더 주어지고 있는 시기다”라고도 했다.
◇ “이직에 따른 기술 유출 보호하는 제도화 필요”
바이오업계 인력 쟁탈전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10여 년 전 SK케미칼(SK바이오사이언스의 전신)이 백신 사업에 진출할 때 녹십자에서 인력을 대거 영입했고, 삼성이 바이오산업 진출을 준비하던 2010년 LG생명과학 출신의 임원이 삼성전자로 이직해 LG생명과학이 이 직원에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승소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문제는 동종 업계 인력 유출이 기술과 영업망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씨젠은 직원 퇴사로 공석이 된 멕시코 법인장을 3개월째 구인 중에 있다. 그러는 사이 글로벌 진단기기 1위인 로슈 진단은 올해 멕시코에 코로나19 진단키트를 출시했다. 시장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했다가 시장을 내 줄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생명과학산업 분야 이직에 따른 영업 기밀 유출이 빈번하다 보니 영업 비밀 방어법(DTSA)이라는 법도 생겼다. 채용을 할 때 동종 업계 이직 금지 조항을 계약에 넣는 것이 일반적이고 기업 간 소송도 빈번하다. 업계 관계자는 “제약·바이오업계에서는 핵심 인력을 경쟁사에 빼앗기는 것은 회사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교류협력팀장은 “산업이 커지면 그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핵심 인력에 대한 수요는 클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건강한 바이오업계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핵심 인력 이동으로 인한 기술과 영업망 유출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