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한 지난해 국내 제약사들의 실적은 주춤했다. 그런데 이들의 연구개발(R&D)투자 규모는 오히려 전년과 비교해 18%가량 늘었다. 제약 바이오 산업은 반도체나 자동차 조선 등과 비교해 해외 진출과 기술 개발에 뒤쳐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 생명’과 직결돼 보수적으로 접근했고, 국내 시장이 보장돼 있어 공격적인 투자의 유인(誘引)이 없었다. 그런 산업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원희목 제약바이오협회장은 “과거 내수 위주의 저위험 저수익 전략을 고수했던 제약업계에서 산업의 성장과 생존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원 회장은 “코로나19사태를 계기로 정부에서 제약바이오 산업에 강력한 제도적 정책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만 신약개발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국내 제약사와 바이오벤처가 좀더 적극적으인 도전에 나서줄 것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업계가 그동안 축적한 에너지가 비등하다고 본다”고도 했다. 원 회장을 2일 서울 방배동에 있는 제약회관에서 만났다.


원희목 제약바이오협회장.

ー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제약·바이오 산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 같다. 업계에서도 그런 분위기 변화가 느껴지나.

“제약 바이오 산업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제약·바이오 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정부가 지난 2017년 100대 국정과제에서 ‘미래형 신산업’으로 제약·바이오를 선정했다. 그런데 이번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을 겪으면서 제약·바이오 산업의 보건·안보적 가치가 주목받게 됐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방역과 의료체계가 취약한 일부 국가들이 심각한 혼란과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선진국 중 일부에서도 의약품 부족을 겪으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기도 했다. 제약·바이오 산업이 단순 ‘고부가가치’ 산업을 넘어 감염병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키는 가치가 강조됐단.”

ー반대로 제약 산업은 국민 생명과 직결되다 보니 가장 보수적인 산업으로 통한다. 쉽게 변화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해 국내 72개 제약사가 연구개발(R&D)에 2조2618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안다(금융감독원 공시). 이는 전년과 비교해서 18.1%나 증가한 수치다. 국내 제약업의 역사는 100년이 넘지만, 막상 R&D의 역사는 길지 않다. 국내 제약사들이 R&D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0년에 불과하다. 국내 제약산업이 그동안 내수위주의 저위험 저수익 전략에 머물렀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미래 주력산업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업계도 산업의 성장과 생존을 위해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국민 건강권 확보 차원에서도 백신 주권, 제약 주권 확립이 필요하지 않나.”

ー‘백신주권’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국산 코로나19 백신이 곧 나올 것으로 보나. 이르면 연내 국산 코로나19 백신이 사용 승인을 받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늦더라도 국산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공감한다. 코로나19가 일반 독감처럼 만성화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나 새로운 형태의 팬데믹이 될 가능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의 완제를 위탁생산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이번 위탁생산 계약이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기술이전도 함께 맞물려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런 기회를 잡아서, 국내 토종 기업들이 코로나19 백신을 생산해나가는 과정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ー우리 제약업계와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미국에서는 글로벌 제약사인 화이자와 바이오벤처인 모더나가 mRNA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화이자는 독일의 바이오벤처인 바이오엔테크사(社)와 협력해 개발했고, 모더나는 미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제약 바이오 시장에서 기업이 힘을 합치는 것은 이미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제약사 간 협력은 물론, 제약사와 바이오벤처, 산학, 민관협력까지 개별 주체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해 한계를 극복하고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과 직접 비교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도 산업계가 체감할 수준의 정부 투자 정책이 필요하다.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개발이 진행 중인 코로나19 백신이 시장에 출시될 수 있도록 ‘손실보상제’ 등 지원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이 밖에 정부 주도 펀드를 만들어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기업에 투자해 성공하면 그 수익을 나누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ー하지만 신약 개발은 진입장벽이 높다.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뜻이다.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더라도, 화이자와 같은 거대 기업과 맞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후발주자로서 한국이 가능성은 있을까.

“신약 개발 성공 확률이 낮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개발이 어렵더라도 지속적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다고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는 게 없지 않나. 실패는 노하우와 내공이 된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투자한 이상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미국 애브비(Abbvie)사가 개발한 류마티스 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는 지난해에만 22조원어치가 팔렸다. 연간 매출액이 22조원이 넘는다는 뜻이다. 이건 엄청난 규모다. (국내 제약시장 규모는 24조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만 신약 개발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허가한 신약의 38%가 바이오벤처가 개발한 약이다. 이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에도 분명히 기회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신약 개발을 도전했으면 좋겠다. 국내 제약사들도 다국적 제약사에 단순 기술 수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자체 허가도 노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지원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지금처럼 정부가 기획하고 틀을 만들어 업계를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업계가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막후지원을 하는 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