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거침없이 퍼져나갔던 지난해 3월. 전 세계는 비관론으로 가득했다. 코로나19 백신은 향후 3년 동안 기대할 수도 없다고 했고,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감염병의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중국 우한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지 몇 주 만에 코로나19의 스파이크 유전자의 시퀀스가 밝혀졌고, 지난해 12월 미국 화이자 제약과 독일의 바이오벤처인 바이오엔테크가 개발한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방식의 코로나19 백신이 영국에서 첫 접종됐다.
전 세계 언론들은 ‘인류의 반격(反擊)’이 시작됐다’고 타전했다. 코로나19 사태 1년 6개월 여 만인 5월 현재 전 세계 152개국에 5억6000만명이 넘는 사람이 백신을 접종했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바이오벤처들은 스타덤에 올랐다. 바이오엔테크는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으로 떠올랐고, 터키 이민자 출신의 우구르 샤힌 대표이사(CEO)는 독일 100대 부자 반열에 올랐다.
◇ 코로나19로 한 단계 점프한 K 제약·바이오
국내 기업 중에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한 곳은 없지만,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사태의 반전은 있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제약·바이오 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로 사람들이 왕래를 줄이면서 병원·약국의 의약품 매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1년 국내 바이오 업체들은 크게 성장했다. 글로벌 바이오 의약품 수요가 크게 늘면서 위탁생산(CMO),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산업이 큰 데다 국내 진단키트 기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코로나19는 오히려 이 기업들에게 기회가 됐다. 그 덕분에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 가운데 매출 1조원을 넘긴 이른바 ‘1조 클럽’에 드는 기업은 2년 전 6개에서 9개로 늘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2만8022㎡ 규모의 인천 송도 공장을 둘러볼 수 있는 가상현실(VR) 시스템을 구축해 ‘온라인 세일즈’에 나섰고, 이를 통해 지난해에만 1조8000억원 규모의 신규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올해에 모더나 코로나19 백신의 완제 공정을 맡으면서 세계 최대 규모 CMO로 이름을 알렸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mRNA 백신 원액 생산 설비를 증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상태다.
진단키트 분야도 ‘코로나19 특수’에 힘입어 최근 2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씨젠, 바이오니아, SD바이오센서 등 국내 진단키트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다. 이런 가운데 SD바이오센서의 지난해 매출은 1조686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730억원)과 비교해 23배 급증했다. 이 회사는 올해 1분기에만 지난해 연매출의 70%에 해당하는 1조179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바이오시밀러도 약진했다. 셀트리온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6% 늘어난 4570억원을 기록했다. 남은 3개 분기 동안 1분기 수준의 매출을 낸다면 올해 예상 매출은 2조원에 육박한다. 국내 바이오 산업 수출액은 지난해 141억달러(약 15조2500억원)로 1년 전과 비교해 54.4% 급증했다.
◇ R&D 투자로 퀀텀 점프 준비하는 대형 제약사들
국내 전통 제약사들은 CMO, 바이오 시밀러, 진단키트 업체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주춤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국내 제약 산업이 이른바 ‘퀀텀 점프(대도약)’를 이룰 적기라고 본다.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조성된 사회적 환경이 신약 기술 개발과 산업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인다는 것이다.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이 이런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예방을 목적으로 한 ‘백신’은 제약산업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분야다. 정상인의 몸에 약물을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전 세계 정부는 기존에는 허용하지 않았을 임상 시험도 긴급 승인했다.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제약·바이오 산업이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보건·안보 산업으로 더 주목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환경은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바이오벤처엔 기회가 됐다. 미국 화이자 코로나19 백신과 모더나 백신 모두 바이오벤처의 기술이 대규모 자본과 결합한 결과였다. 국내 대형 제약사들도 이런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기업공시를 보면, 지난해 72개 국내 제약사의 연구개발(R&D) 투자는 2조2618억원으로 지난 2019년과 비교해 18.1%가 늘었다.
대기업과 바이오벤처의 협업도 본격화되고 있다. 한미약품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는 코로나19 mRNA 백신을 개발하는 진원생명과학과 손을 잡았다. 동화약품은 혁신형 치료재료 전문벤처인 넥스트바이오메디컬에 40억원 규모를 투자했다. 대웅제약은 지난해 9월 ‘신약개발’ 플랫폼인 아이엔타라퓨틱스라는 자회사를 세웠다.
원희목 회장은 “국내 제약업의 역사는 길지만, 상대적으로 연구개발(R&D)의 역사는 길지 않았다”며 “과거에 국내 제약사들이 복제약과 내수 위주의 저위험 저수익 패턴을 유지했다면,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이 산업의 경쟁력을 세계적으로 끌어 올려야 하는 시기에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으며, 그런 역량을 축적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 글로벌 백신 허브 육성...적극 지원나서는 韓 정부
제약 업계는 이런 변화에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바이오벤처에게 국방부가 생화학 공격 방어 목적으로 만든 시설까지 무상 제공한 것으로 안다”며 “한국 정부도 바이오 산업의 발전을 바란다면 수천억원의 임상비용 정도는 지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업계는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도전하고 있는 국산 코로나19 백신 개발 성공이 이런 노력의 첫 단추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19가 일반 독감처럼 만성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른바 ‘토종 백신’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를 계기로 전 세계 제약시장에 신약이 계속 출시되면서, 앞으로 10년 이상 바이오 시장이 활황을 띌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UN 통계에 따르면 2017년 전 세계에서 승인된 약의 65%가 생명공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업계는 이런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제약 산업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제약 산업을 눈여겨 보고 있다.
우리 정부도 ‘글로벌 백신 허브’ 육성을 목표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혁신성장 BIG3(시스템 반도체·미래차·바이오헬스) 추진회의에서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주요 코로나19 백신을 위탁생산하는 등 우리나라가 세계의 백신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며 “정부는 신약·혁신 의료기기 등 핵심 기술에 대한 R&D 집중 투자, 사업화 지원, 임상 인프라 확충, 전문인력 육성 등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는 이달 발표하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글로벌 백신허브 도약 기반 구축 방안과 관련한 사항을 담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