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각) 러시아 주요 금융기관의 미국 내 자산 동결 및 거래 금지를 골자로 하는 대(對)러시아 제재를 발표했다. 지난 22일에 이어 두 번째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할 당시에 비해 제재 강도를 높였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의 제재 결의와 달리 러시아 경제에 ‘핵심 타격’을 줄 수 있는 에너지 관련 부분은 빠졌다. 유럽행(行) 천연가스 수출 대국인 러시아를 공격했다가 자칫 인플레이션을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 러시아 에너지 대기업과 유럽 각국의 경제적 고리를 고려할 때 동맹국의 경제에 타격을 입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
미국은 이날 러시아 최대 상업 은행인 스베르방크(Sberbank)와 VTB 은행의 각 자회사, 러시아 3대 금융기관으로 꼽히는 오트크리티예(Otkritie) 은행, 노비콤(Novikom) 은행, 경매회사 소보콤(Sovcom) 및 각각의 자회사 90여 곳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특히 스베르방크 등 13개 은행의 미국 내 신규 차입과 채권 신규 발행을 금지했다. 러시아 경제에 핵심적인 기관이 미국과 서방 금융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러시아 무역 전반에 제약을 가하려는 조치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DW)에 따르면 스베르방크는 러시아 전체 은행 자산의 35%, VTB 은행은 16% 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조치로 이들의 미 달러화 거래는 완전히 차단된다. 미 재무부는 러시아 금융기관의 일일 외환거래액 460억달러 중 80% 이상이 달러로 이뤄진다며 “러시아 은행 시스템의 절반을 차지하는 두 거대 은행이 미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도록 했다”고 밝혔다. 국제금융협회 엘리나 리바코바 이코노미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러시아 최대 은행을 공격하면 핵심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했다.
벨라루스의 국영 은행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러시아의 우방인 벨라루스가 우크라이나 북쪽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허용한 데 대한 조치다. 여기에는 ▲벨라루스에서 4번째로 큰 금융기관이자 벨라루스개발은행이 운영하는 벨린베스트뱅크(Belinvestbank) ▲11번째로 큰 금융기관이자 ‘뱅크 모스크바-민스트 JSC’로도 알려진 뱅크다브라비트(Bank Dabrabyt)도 제재 대상으로 지목됐다
◇개인 및 사업체
미국발 2차 제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전 비서실장인 세르게이 이바노프와 그의 아들, 세계 최대 상장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의 최고경영자(CEO)인 이고르 세친 및 그의 아들 등 러시아 상류층 인사와 가족들을 겨냥했다.
이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미 금융 시스템 접근을 차단하며 미국 여행을 금지하는 것이 골자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 본인을 제재 명단에 올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벨라루스 정치권에선 빅토르 겐나디예비치 크레닌 국방장관과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볼포비치 국무장관 등이 제재를 받는다. 국방 및 안보 산업체 경우 루카셴코 정권을 대신해 이란과 러시아 등에 군수품을 수출하는 국영 방산기업 MZKT와 알락세이 이바나비치 류마셰우스키 사무총장, 전직 벨라루스 국가보안위원인 알락산드르 피아트로비치 베치아네비치 부사무총장 등 고위급 간부가 포함됐다.
벨라루스 방위산업청(SAMI) 회장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판투스, 비아차슬라우 예브게니예비치 라살라이 부회장을 비롯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책임진 보안 업체 시네시스(Synesis)와 알리칸드르 야우헤나비치 샤트루 최고경영자(CEO)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그 외 항공 분야 방산업체 558 AR과 오보로니예 이니치아티비(Oboronnye Initsiativy), 군사용 반도체 제조업체 인테그랄(Integral), 장갑차 생산업체 미노터 서비스(Minotor-Service)와 경영진이 미국발 제재를 받게 됐다.
◇수출 통제
미 상무부는 러시아군의 공격 능력 유지에 필요한 기술 및 상품에 대한 러시아 수출을 봉쇄했다. 크게 ▲국방 ▲항공우주 ▲해양 분야로 나뉜다. 주요 분야는 반도체와 컴퓨터, 통신, 정보보안 장비, 레이저, 센서 등이며 유럽연합(EU)과 일본,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동참할 예정이다. 상무부는 “러시아 전역에 대한 수출을 통제해 푸틴의 권력 행사를 막겠다”며 더 많은 국가가 수출 통제 정책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반면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에 대한 제재는 포함되지 않았다. 에너지 대기업에 대한 타격이야말로 러시아 경제에 중상을 입힐 방안으로 거론됐었다. 최근 유가가 급등하는 가운데 러시아산(産) 천연가스와 석유를 차단하면 푸틴이 반사이익을 얻을 거란 우려에서다. 백악관 관계자는 “미국 및 동맹국에 미치는 영향과 고유가 등을 고려해 러시아 경제만 타격하는 방향으로 제재를 설계했다”고 밝혔다.
로스네프트는 최근 이탈리아 국영 석유기업 에니(Eni)와 장기 가스 계약을 맺은 에너지 공룡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로부터 전체 가스 수입량의 40%를 공급 받는 이탈리아는 해당 계약을 통해 유럽 통상 가격보다 저렴하게 가스를 구매해왔다. 특히 푸틴은 이탈리아에 추가 물량을 제공할 수 있다며 정상회담까지 계획했다. 미국으로서는 동맹인 이탈리아 경제와 직결된 로스네프트를 제재하는 것이 외교적 부담일 수밖에 없다.
같은 날 EU 27개 회원국 정상이 합의한 제재는 ▲에너지 ▲교통 ▲금융 부문으로 나뉜다. 각 분야에서 러시아의 무역과 제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수출 통제도 실시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러시아 주요 기업과 개인에 대한 제재도 추가된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과 대상은 오는 25일 이후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제재 규모와 강도 등 세부 내용과 관련해 회원국 간 이견 조율이 필요해서다.
유럽이사회는 이날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중대하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추가적인 제한 조치에 합의했다”며 금융, 에너지, 운송, 수출 통제 및 수출 금융, 비자 정책, 신규 상장 기준, 러시아 개인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다만 “우리의 제재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며 “내일(25일)은 큰 진전을 보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에너지
EU는 러시아가 대유럽 에너지 수출을 통해 최대 이익을 얻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수출 통제를 통해 러시아가 정유시설 등을 개량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석유 산업에 타격을 줄 방침이다. 그러나 천연가스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유럽이사회는 성명에서 천연가스를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에너지 및 교통 부문을 포함한 비상 대책과 신속한 준비를 요구했다”고만 했다.
현재까지 나온 에너지 관련 제재는 독일의 노르트 스트림-2 승인 절차 중단이 전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 22일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1230km의 천연가스관 승인 절차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다고 밝혔다. 다만 DW는 해당 가스관이 완공 이후 현재까지 가동을 시작하지 않은 데다 승인에 필요한 검토 작업을 임시 중단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폐쇄’와는 다르다고 전했다.
에너지를 제외한 대러시아 수출 금지 항목은 ▲항공기 등 항공산업 관련 물품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방산 분야 등이다. 러시아의 국영 군수회사를 제재 대상에 올린 건 미국과 유사하다.
◇금융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러시아 금융시장의 70%를 겨냥한 제재를 결정했다”며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퇴출하는 안은 빠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SWIFT 결제망 퇴출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러시아 채권단에 대한 수백억 달러의 지급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현실화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번 협의에서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스토이나·라트비아·리투아니아)은 러시아의 결제망 퇴출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했다. 반면 ‘다음 번 제재를 남겨둬야 한다’는 독일의 입장에 힘이 실렸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또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부 유럽과 발트해 국가들은 강력한 제재를 요구한 반면 이탈리아와 독일, 키프로스는 점진적 접근을 선호한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