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4일(현지 시각) 새로운 대(對)러 제재를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가진 대국민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그가 외교를 거부하고 이 전쟁을 선택했다. 이제 그와 그의 나라는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1~2위 금융기관인 스베르방크(Sberbank)와 VTB, 오트크리티예(Otkritie)를 비롯해 각각의 자회사들이 미국 금융기관에 예치한 자산은 동결됐다. 미국인이 이들 금융기관과 거래하는 것도 금지됐다. 스베르방크 등 13개 금융기관은 향후 미국에서 신규 차입을 하거나 채권을 신규 발행하지도 못하게 됐다.

미국은 푸틴 대통령 측근과 그 가족들도 제재 목록에 추가로 올렸다. 여기에는 푸틴 대통령의 전 비서실장인 세르게이 이바노프와 그의 아들, 세계 최대 상장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의 최고경영자(CEO)인 이고르 세친과 그의 아들 등 러시아의 주요 상류층 인사와 가족들이 포함됐다. 이번 제재에 따라 이들의 미국 소유 자산은 동결됐고, 이들의 미국 금융 시스템에 대한 접근과 미국 여행도 차단됐다.

미국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북부 진입을 도운 벨라루스에 대해서도 24개 기관 및 개인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다만 이날 발표에 푸틴 대통령을 직접 제재하는 안은 포함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관련 질문에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만 답했으며, 푸틴 대통령과 대화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통제도 시작했다. 러시아군의 공격 능력 유지에 필요한 기술과 품목이 러시아에 수출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와 관련 백악관은 국방·항공우주·해양 분야를 주로 겨냥했다고 밝혔고, 상무부는 따로 발표한 보도 자료에서 반도체·컴퓨터·통신·정보보안 장비·레이저·센서 등이 대상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상무부는 또 유럽연합(EU)과 일본,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이번 조치에 동참할 것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나라들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 시각)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대(對)러시아 제재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하기에 앞서 독일,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영국 등 주요 7개국(G7), 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지도자들과 화상 회의를 갖고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러시아에 책임을 묻기 위해 ‘엄청난 타격’을 가하는 제재 및 다른 경제적 조처 패키지를 진행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G7 정상들은 회의 뒤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국제법과 유엔 헌장 위반”이라고 규정하고 “가혹하고 조율된 경제 및 금융 제재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이날 발표한 제재안에는 가장 강력한 제재안으로 여겨졌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이 포함되지 않아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SWIFT 결제망은 각국 금융기관이 8자리나 11자리 코드로 안전하게 금융 결제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세계 주요 은행과 금융기관 1만1000곳이 이용하고 있다. 즉, SWIFT 결제망에서의 퇴출은 국제 금융 거래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러시아를 SWIFT 결제망에서 퇴출하는 안은 유럽 동맹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러시아 채권단에 대한 수백억 달러의 지급이 차질을 빚을 수 있어 이미 배제된 카드”라고 보도했으며, 익명을 요청한 한 독일 정부 관계자도 지난달 한델스블라트에 “미국과 EU가 러시아를 SWIFT 결제망에서 차단하는 방안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대신 러시아 주요 은행을 겨냥한 제재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주력 수출 분야인 에너지 부문도 이번 제재 대상에서 빠졌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 같은 에너지 기업을 제재해야 푸틴 정권에 보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 정도까지가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우리는 러시아가 입을 장기적인 영향을 최대화하고 미국 및 동맹국이 입을 영향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이번 제재를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익명의 미 정부 고위 관리도 이날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고유가를 감안할 때 러시아산(産) 석유와 가스를 차단하면 오히려 푸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제재는 우리가 아닌 러시아 경제를 타격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