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2일(현지 시각) 곧바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 파병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이 지역의 분리·독립을 승인한 뒤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가 이어지자 한 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상원의 해외 파병 승인 후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요청이 있을 경우 두 공화국에 군사지원을 제공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DPR·LPR과 맺은 (우호) 조약에는 (유사시) 이 공화국들에 군사지원 등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도록 규정한 조항들이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필요할 경우 맡은 책임을 수행할 것”이지만 “지금 당장 군대가 그곳(돈바스)으로 간다는 말은 아니다. 가능한 행동에 대해 미리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현지 상황에 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원은 앞서 이날 푸틴 대통령의 해외 파병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상원이 승인한 이 안에는 해외에 파견되는 러시아 군병력 수와 활동 지역, 주둔 임무 및 기간 등을 대통령이 직접 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번 상원 결정으로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에 병력을 투입할 법적 근거를 마련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군 배치를 공식화했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친(親)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분리·독립을 천명하고 이들 지역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명령했다. 당시 대국민 TV 연설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는 고대 러시아 땅으로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며 “현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더 정확히는 볼셰비키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 위기 해결을 위해선 “우크라이나 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포기하고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도 되풀이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친러시아 반군 세력과의 무력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15년 체결한 민스크 협정에 대해서도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며 폐기를 선언했다.
또 DPR과 LPR의 영토 범위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다른 돈바스 지역도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DPR과 LPR의 친러시아 반군 세력은 현재 돈바스 지역의 약 3분의 1만을 손에 넣은 상태다.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선전포고’에 그간 예고해온 대(對)러 제재를 발동했다. 미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은 이날 성명을 통해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대외경제은행(VEB)과 국방 부문 자금 조달을 담당하는 프롬스비야즈은행(PSB), 그리고 이들의 자회사 42곳을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VEB와 PSB는 러시아의 국방 능력과 경제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며, 러시아에서 각각 5번째, 8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독일은 자국과 러시아를 잇는 천연가스관 ‘노르트스트림-2′의 사업 승인 절차를 중단시켰다. 영국은 러시아 은행 5곳과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 기업인인 겐나디 팀첸코와 보리스 로텐베르그, 이고르 로텐베르그 등 3명을 제재하기로 했다. 또 추가 제재의 일환으로 러시아가 런던 금융시장에서 국채발행을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러시아에 대한 신규 제재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이번 제재에는 돈바스 지역 분리·독립 승인에 관여한 러시아 하원 의원 등 개인과 러시아의 의사 결정권자에게 자금을 대는 은행, DPR·LPR에 있는 사업체 등이 포함됐다. EU는 DPR·LPR 지역과 EU간 무역을 금지하고 EU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러시아 정부의 능력도 제한하기로 했다.
서방을 중심으로 한 반(反)러시아 전선은 아시아 일부 국가들이 참여하며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수출 통제를 시행하는 데 싱가포르, 일본, 대만의 지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수출 통제 물품으로는 반도체 등이 거론됐다.
미국은 앞서 중국 거대 통신업체 화웨이에 타격을 주기 위해 ‘해외직접생산품규칙(Foreign Direct Product Rule)’을 적용, 자국 소프트웨어나 기술을 기반으로 제조된 제품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바 있다. 미국이 러시아 상황에 맞춰 이 제재를 시행하면 러시아는 가스와 원유, 국방, 민항 산업에 중요한 기술의 수입은 물론 자동차, 휴대전화, 다른 전자제품의 수입이 막혀 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포린폴리시는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