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유럽과 미국에서 상품 값의 상한선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가격 통제’ 논의가 부상하고 있다.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가격을 결정하도록 두기에는 인플레이션이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앙은행의 부양책과 공급망 붕괴 등 복합적 요인으로 폭등한 물가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의 가격 개입이 시장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18일(현지 시각) 유럽연합(EU) 전문매체 유랙티브는 최근 경제학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정부가 가격 상한선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렬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 감염세는 오미크론 등 변이를 거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약화하고 있으나 글로벌 공급망 병목현상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여전한 상황이다. 이로써 정부 통화정책의 한계점이 여실히 드러나고 ‘가격 통제’라는 오래된 논란에 불을 지폈다는 것이다.
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5% 상승해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9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량을 대폭 줄여 지난달 유로존 에너지 가격은 전년 대비 26% 올랐다. 에너지 요금 상한제를 시행 중인 영국에선 올해 1분기에 에너지 가격이 최대 50% 오를 거란 전망이 나온다. 외신들은 오는 19일 발표 예정인 영국의 12월 CPI 상승률이 전달 기록(5.1%)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정부의 물가 통제가 시장을 방해할 수 있다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CB 대변인은 “물가 통제는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당사자에 부담을 전가할 뿐”이라고 말했다.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면 기업이 원재료 값 상승분을 고스란히 떠안아 피해를 입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ECB가 당분간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키로 한 상황에서 물가를 잡을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캠퍼스의 경제학자인 이사벨라 웨버는 최근 가디언에 실은 기고문에서 “정부 차원의 전략적인 가격 통제를 고려해야 한다”며 시장 지배력을 가진 대기업들이 공급 문제를 ‘폭리의 기회’로 활용해 왔다고 주장했다. 방크오스트리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슈테판 브루크바우어도 “유럽에서 가격 통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며 “부작용이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정책 입안자들이 이 정책을 시행하더라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랙티브는 전문가 발언을 인용해 일부 기업의 지배력이 막강한 시장에서는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또 ECB 통계 자료를 근거로 EU 전체 시장 내 가격의 13%가 국가의 규제를 받고 있다며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비록 다른 시대의 도구처럼 보일지라도 가격 통제는 여전히 유럽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U 회원국인 헝가리는 다음달부터 정부 주도로 필수 식료품인 밀가루와 설탕, 해바라기유, 우유, 돼지다리와 닭가슴살 가격을 지난해 10월 15일 수준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앞서 독일 베를린에선 시(市)정부 주도로 3000채 이상 주택을 보유한 민간기업의 주택을 몰수하는 정책이 주민투표를 통과했다. 2009년 대비 임대료가 두 배 가까이 올라 생계를 위협 받는 세입자가 급증하자 시정부가 적극 개입키로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서도 관련 논의가 거세지고 있다. 미 CNN은 같은 날 ‘정부가 식품과 에너지 값을 통제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연간 인플레이션이 10년 만에 최고치인 7%나 뛰었고 올해 말 중간선거도 다가오고 있다”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조치가 물가를 제대로 잡지 못할 경우 ‘가격 통제’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이 한층 뜨거워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CNN은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가격 통제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며 “기업이 부과할 수 있는 금액을 정부가 제한하는 것은 시장을 왜곡할 뿐더러 장기적 물가 해결에도 도움이 전혀 안 된다”고 했다. 시카고 대학이 이달 초 경제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와 같이 정부가 기업에 가격 상한선을 적용한 관행이 물가 안정에 기여하느냐는 질문에 동의한 응답자는 25% 미만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