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제조업 기술을 기반으로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던 독일이 최근 몇 년 새 높은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인공지능(AI) 패권을 노리는 미국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에너지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에너지가 국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독일과 미국의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본다.[편집자주]

5년 후부터 국내 주요 원자력 발전소 방사성 폐기물 임시 저장 시설의 포화 시점이 잇따라 도래한다. 국회는 최근 사용후 핵연료의 영구 보관 시설을 만들기 위한 법적 근거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지만, 목표 준공 시점까지 20년이 걸리는 데다 부지 선정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한 상황이다.

총 25기의 원전을 가동 중인 한국에서는 매년 700톤(t) 이상의 사용 후 핵연료가 발생한다. 한국은 사용후 핵연료를 독자적으로 재처리할 권한이 없어 원전 내부 저장조(물건을 모아 간수하는 통)에 쌓아두고 있다.

20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국내 원전은 오는 2030년 전남 영광의 한빛 원전부터 순차적으로 사용후 핵연료 저장 시설이 포화된다. 현재 국내 원전은 사용후 핵연료의 영구 처분 시설이 없어 각 발전소 내부에 임시로 습식(濕式) 저장조를 운영하고 있다. 사용후 핵연료의 저장 방식은 물을 이용해 냉각하는 습식과 공기로 냉각해 보관하는 건식(乾式)으로 나뉜다. 건식 저장 시설은 습식에 비해 운영 비용이 저렴하고 용량을 늘리거나 장기적으로 관리하기도 쉽다는 장점이 있다.

월성 원전 단지 내부에 조성된 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 설비. 오른쪽 아래 단의 흰색 원통형 설비가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지은 캐니스터(300기), 왼쪽 위 단의 창고 스타일 콘크리트 건물이 2007년부터 운용해온 맥스터(7기). 앞쪽 넓은 공터는 추가로 맥스터 7기를 짓기 위해 미리 닦아놓은 부지다. / 조선비즈DB

사용후 핵연료는 습식 저장 시설(수조)에서 5년 간 저장하면 건식으로 저장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는 월성 원전을 제외한 나머지 원전이 습식 보관소만 운영하고 있다. 건식 저장 시설이 들어서면 사용후 핵연료가 영구 보관될 것을 우려해 원전 주변 지역에서 건설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습식으로 운영 중인 국내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 저장조 유효 기간은 곧 끝날 예정이다. 한빛 원전은 지난해 3분기를 기준으로 저장률이 82.3%를 넘어섰다. 저장률 75.3%인 한울 원전은 2031년에 포화 시점이 도래하며, 90.8%의 저장률을 기록 중인 고리 원전도 2032년이 되면 습식 저장조 운영이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월성과 새울 원전의 예상 포화 시점은 각각 2042년, 2066년이다.

해외 원전 강국들은 이미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분 시설을 완공했거나, 건식 저장 시설을 지었다. 핀란드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인 ‘온칼로’를 준공해 올해부터 운영을 시작한다. 스웨덴도 오는 2035년 완공을 목표로 사용후 핵연료 영구 처분 시설을 만들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는 건식 저장조를 운영 중이다.

핀란드 올킬루오토 원전과 핵폐기물 처분장 온칼로가 위치한 올킬루오토섬 전경. 좌측 상단의 붉은 건물이 올킬루오토 원전이다. /조선비즈DB

국회는 지난달 27일 본회의를 열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1986년 경북 영덕과 울진 등에서 방사성 폐기물 처분 부지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 후 약 40년이 지나서야 영구 처리 시설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22년 사용후 핵연료 영구 처리 시설을 완공하기 위한 과정과 시기를 전망하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연구개발(R&D) 로드맵’을 공개했다. 로드맵에 따르면 정부는 2050년에 폐기물 중간 저장소를 지어 원전에 보관 중인 사용후 핵연료를 반출하고, 2060년까지 영구 처분 시설을 완공할 계획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한빛 원전을 기준으로 중간 저장소 완공 때까지 20년 동안 각 원전에 건식 저장 시설을 확충해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할 방침이다.

이는 모든 절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했을 때를 가정한 것으로 원전 관련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을 설득해 부지를 선정하는 작업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핀란드의 경우 1983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리 시설을 짓겠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18년이 지난 2001년이 돼서야 부지를 선정했다. 스웨덴 역시 건설 계획 수립부터 부지 확보까지 10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 관련 시설에 대한 지역 주민의 거부감은 과거에 비해 줄어든 상황”이라며 “부지를 제공하는 지역에 여러 경제적 혜택을 주고 지역 소멸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법에 담긴 조항으로 일부 원전의 수명 연장(계속운전)이 어려워질 수 있는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이 법은 원전 부지 안에 있는 사용후 핵연료 저장 시설의 용량을 ‘원전 설계 수명 중 발생 예측량’으로 제한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 2년 주기로 설계 수명이 끝나는 월성 2·3·4호기는 추가 저장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계속 운전이 좌초될 가능성이 크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특별법이 최초 허가된 설계 수명의 예측량으로 저장 용량을 묶은 것은 원전 비중 확대에 반대하는 야당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법 개정이 조속히 이뤄지지 않으면 내년부터 원전의 완전 가동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관련 기사

[에너지 전쟁]① 제조업 강국은 옛말… 비싼 에너지에 무너지는 독일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2/G3RK5PF3MJADJOWG7EE23OKDUA/

[에너지 전쟁]② 탈원전 독일, 유럽 전기료 올리는 ‘민폐 국가’ 전락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3/2RNO6OG7M5BSTDXOOBL33OEPX4/

[에너지 전쟁]③ 실패 인정한 독일 “탈원전 재검토, 화력발전소 건설”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4/O2UNYXOINBAALK5665J62ADJ2Q/

[에너지 전쟁]④ “AI로 전력 수요 200배 증가”… 비상사태 선언한 美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7/TNLSAQK6SJBDXJIDRBVUUJC5N4/

[에너지 전쟁]⑤ AI는 안정적 전기 필수… 재생 에너지 줄이는 美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8/I2MHYMULKRGVDD2WSDRXSF7SZA/

[에너지 전쟁]⑥ 野 “반성한다”면서도 원전 반대… 尹 탄핵되니 원전 줄인 정부

https://biz.chosun.com/industry/company/2025/03/19/JDQVMSSHDRFGFFORBUTQ3FXK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