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유와 가스 시추를 늘려 에너지 가격을 낮추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국내 기업들이 업종별로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정유사와 석유화학 기업은 수혜를 볼 가능성이 커진 반면,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 자동차 제조사와 2차전지 업체 등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 20일(현지 시각) 미국 4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최근의 인플레이션 위기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의해 발생했다. 국가 에너지 비상 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보유 중인 석유와 가스를 사용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에너지 가격을 낮추고, 전세계에 미국의 에너지를 수출하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발 밑에 있는 액체 황금(liquid gold)을 통해 다시 부유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유와 가스 시추를 확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이다.

20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윌 샤프 백악관 비서실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 석유화학, 유가 하락 수혜… 정유사는 정제 마진 개선 기대

미국이 석유 생산을 늘리면 석유화학 업종의 수혜가 예상된다. 최근 수년간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중국이 값싼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부진한 실적에 허덕였다. 미국이 원유 공급을 늘려 유가가 장기간 하향 안정세를 보이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나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틈타 러시아로부터 너무도 저렴한 원유를 받아 썼다”며 “이로 인해 지난 3년 간 한국의 정유·석유화학 업체들은 원가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석유 생산을 늘리고 러시아에 대한 수출 제재가 완화되면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의 실적이 다시 개선 흐름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의 원유 시추 현장 이미지/일러스트=챗GPT·달리3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늘어 유가가 하락하면 수요 증가로 정유사들의 정제 마진 역시 개선될 것으로 관측된다. 정제 마진은 휘발유 등 석유제품의 가격에서 원유 수입 비용과 운송비 등을 제외한 값으로 정유사들의 수익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다.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고 석유제품 수요가 늘면 정제 마진이 개선돼 정유사 실적이 좋아진다.

조선업 역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따른 수혜를 볼 것으로 전망된다. 가스 시추를 늘리고 에너지 수출을 확대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액화천연가스(LNG·liquefied natural gas) 운반선의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LNG 운반선 수주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중국과의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LNG 수출 확대에 따른 운반선 수요가 한국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한화오션 거제사업장./한화오션 제공

◇ “전기차 이점 줄었다” 車·배터리 울상… 신재생에너지도 타격

현대차(005380)기아(000270) 등 완성차 제조사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으로 정책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석유 시추 확대로 유가가 장기간 하향 안정화되면 가솔린 등 내연기관차에 대한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수 년 간 전기차 라인업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에 따른 보조금 지급 혜택을 기대하고 76억달러(약 11조원)를 투입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생산 공장인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준공하기도 했다. IRA는 미국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이를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이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IRA마저 폐기하거나 대폭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데, 유가까지 장기간 약세를 보일 경우 전기차 수요는 더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이는 전기차를 포함한 친환경차의 비중을 늘려온 자동차 기업들에게 악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SK온 미국 법인 SK배터리아메리카 조지아주 공장 전경./SK온 제공

같은 이유로 2차전지 제조사들 역시 타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삼성SDI(006400) 등은 미국과 캐나다 등에 공장을 지어 현지 자동차 기업에 배터리를 공급할 계획이었지만, 수요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신재생에너지 기업들 역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석유·가스 시추를 확대하겠다면서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파리기후협약은 지구 온난화 해결을 위한 국제 협약이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조치가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 사용에 대한 제한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며,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수요도 급감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