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015760) 등 공기업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기 위해 관련 절차를 분주히 밟고 있지만, 노동이사의 법적 성격 등 모호한 점이 여전히 많아 혼란스럽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에너지 공기업은 재무개선 작업이 시급한 상황인데, 노동이사제가 본격 시행되면 개혁의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전력은 지난 19일 이사회를 열고 정관 변경안을 심의, 의결했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 개정에 따라 노동이사제 도입 및 임원 수에 관한 사항을 법률과 일치하도록 정비한 것이 골자다. 한전은 3년 이상 재직 근로자 중 노동조합 대표가 추천하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은 사람 1명을 비상임이사로 선임해 이사회 구성원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관을 바꿨다. 한전은 다음달 중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를 구성할 예정이다.
지난 4일 시행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에 따르면, 130개 공공기관은 이사회 결원이 생기는 대로 노동이사를 선임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각 기관마다 관련 절차 진행 정도가 제각각인데, 에너지 공기업은 대부분 규정 마련 작업에 착수했다.
전력거래소는 임추위 규정 적용 범위에 노동자대표 비상임이사를 추가하는 내용을 다음 달 이사회에 부의할 예정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정관 변경을 위한 사장 결재를 마쳤고, 다음달 중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열어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한전KPS(051600)는 다음주 중 이사회를 통해 정관을 변경할 예정이며, 한국남동발전은 이미 정관 변경과 임추위 구성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졸속 도입 논란을 빚은 노동이사제는 시행 과정 곳곳에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먼저 노동이사의 법적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공운법에 따르면 노동이사는 비상임이사이지만, 상법에서는 사내·사외·기타비상무이사만 있을 뿐 비상임이사가 없다. 상법에 따라 이사를 등기해야 하는 주식회사 형태의 공기업은 이 부분이 정리되기 전까진 노동이사 선임이 완료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공운법 소관의 기획재정부와 상법 소관의 법무부가 논의 중이지만,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 법무부는 비상임이사가 상법상 사외이사 또는 기타비상무이사에 해당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내이사일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에너지 공기업 관계자는 “노동이사의 성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후보자를 추려야 하고, 이 부분이 정리되기 전까진 최종 선임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노동이사가 사내이사로 분류될 경우, 현 임원이 맡고 있는 사내이사 자리가 하나 줄어들 수밖에 없어 조직 내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기재부와 법무부는 늦어도 다음달까지는 결론을 낸다는 계획이다.
과반을 넘지 않는 복수노조 체제인 곳 역시 노동이사 선임 과정에서 잡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력거래소가 대표적이다. 과반수 노조가 없다면 전체 근로자의 5% 추천을 받아 입후보한 근로자 중 전체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은 2명이 임추위에 추천된다. 직원 전체 투표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투표 방식이나 절차 및 공정성을 두고 노조간, 또는 노사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투표 주관자를 노조와 회사 중 누가 맡을지에 대해서도 정해진 바가 없어 노사간 합의가 필요하다.
정관 변경을 마치고 임추위를 구성한다 해도 노조 추천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을지 미지수다. 기재부는 경영지침을 통해 노조원이 노동이사로 선임되면 노조원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고 있다. 경영에 참여하는 만큼 독립성을 갖춰야 하며 노조의 이익만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노동이사의 실질적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이사의 권한을 다른 비상임이사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에너지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노조 측은 노동이사가 노조에서 탈퇴하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 추천을 앞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에너지 공기업들이 노동이사제 도입을 마무리해도 문제다. 상반기에만 14조원 넘는 영업손실을 낸 한전 등 에너지 공기업은 재무구조 개선이 시급한 상황인데, 비핵심 자산 매각과 인력 조정 등으로 이뤄진 재무개선안은 직원들의 고통 분담이 필수적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노동이사는 사측이 마련한 재무개선안에 반대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고, 이 과정에서 경영 효율성이 저해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