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전기·전자전시회 ‘CES 2022′가 개막한 5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서쪽 전시장. 짙은 색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사장이 무대에 올랐다. 말쑥한 차림의 정기선 사장은 유창한 영어와 세련된 제스처로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선박과 수소 생태계, 로보틱스 기술을 그룹의 미래 핵심 사업으로 소개하자 국내외 취재진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오미크론 확산으로 미국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 폭등하면서 이날 개막한 CES는 예년보다 훨씬 한산했지만, 정기선 사장의 발표 시간이 다가오자 현대중공업 부스는 관람객들로 붐볐다.

올해 처음 CES에 참가한 현대중공업은 이곳에 자율주행 선박과 무인 중장비 콘셉트, 서비스 로봇 등 다양한 제품을 전시했다. 하지만 제품보다 더 주목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 사장으로 승진한 정기선 사장이었다.

CES 2022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정기선 현대중공업그룹 사장./현대차, 현대중공업 제공

앞서 CES 개막 하루 전인 4일에는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의 발표가 전세계 관람객의 이목을 끌었다. 코로나 여파로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온라인 행사로 전환한 상황에서 현대차는 로보틱스 비전을 주제로 미디어 컨퍼런스를 열었다.

직접 무대에 오른 정의선 회장은 “로보틱스를 기반으로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을 메타모빌리티로 확장하겠다”며 “현대차의 로보틱스 비전이 인류의 무한한 이동과 진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2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개막한 CES 2022가 코로나 재확산 여파로 크게 위축된 가운데,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손자들이 CES 행사장을 누볐다. 1세대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한국 경제 성장의 씨앗을 뿌린지 불과 2세대 만에 그의 손자들이 세계 최고 경제 대국 미국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력을 과시한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정몽구 명예회장의 장남, 정기선 사장은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으로, 사촌지간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정주영 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인 중 처음 자동차와 조선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자동차를 설계하고 조선소도 없이 선체를 건조했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이 세계적인 자동차, 조선 업체로 성장한 데에는 ‘도전’이라는 정주영 회장의 DNA가 후대로도 이어진 덕분이다.

정의선 회장은 땅(자동차)과 하늘(도심항공모빌리티·UAM)에서 이동성을 확장하겠다고 나섰고, 정기선 사장은 자율주행 선박을 통해 바다 위 이동의 자유를 높이겠다고 밝혔다. 활동 무대는 다르지만 이들이 동시에 주목한 것은 ‘로봇’이었다.

올해 현대차 부스에는 내연기관차는 물론 전기차도 전시되지 않았다. 대신 현대차는 다양한 로봇 제품을 선보였다. 지난해 인수한 로봇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서비스 로봇 ‘스팟’과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퍼스널·물류 모빌리티 제품이 현대차의 전시장을 채웠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올해 처음 CES에 참여한 현대중공업 부스를 찾아 정기선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진상훈 기자

현대중공업 부스에도 산업용·서비스 로봇이 전시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로봇 계열사 현대로보틱스는 이번 전시에서 커피 제조 로봇과 서빙 로봇을 선보였다. 사촌동생인 정기선 사장을 격려하기 위해 현대중공업 부스를 방문한 정의선 회장이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제품도 바로 이 커피 제조 로봇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로봇이 점점 인간과 가까워지고 있다”며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모두 ‘스팟(서비스 로봇)’을 데리고 다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