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 심리학자 아론 벡은 우울증 치료에 획기적인 접근법을 제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감정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같은 실패를 겪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실패를 ‘무능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사람은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해석했다. 두 사람 가운데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기술이 뛰어날수록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낮아졌다.
벡은 이 연구 결과를 ‘인지적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현대 심리학계에서 ‘우울증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인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렌즈를 통해 봅니다.그리고 우리는 그 렌즈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인지 치료와 정서 장애' 아론 벡, 1976
벡 이후 학자들은 단순하게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실을 더 유연하고 생산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이어서 연구했다.
마틴 셀리그먼, 캐롤 드웩 같은 심리학자들은 ‘성장 마인드 셋’, ‘학습된 낙관주의’ 같은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들 모두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장소,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롭게 바라볼 때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연구 결과가 쌓이면서 인지적 재구성 이론은 경영학계에서도 큰 성공을 끌어냈다. 스티브 잡스는 전화기를 휴대용 컴퓨터로 재해석해 아이폰을 만들었다. 에어비앤비는 ‘남의 집’을 ‘여행 숙소’로 재구성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와인 세계에도 이런 인지적 재구성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호주 남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리버랜드 지역 렌마크 크릭(Renmark Creek) 와이너리가 그 가운데 하나다.
리버랜드는 호주 포도 생산량 가운데 약 30%를 담당하는 거대 산지다. 머레이 강을 따라 펼쳐진 광활한 평야에서 매년 수십만 톤이 넘는 포도가 자란다.
그러나 리버랜드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이곳은 ‘벌크와인의 고향’으로 여겨졌다. 벌크와인이란 병에 담기지 않은 채 팔리는 와인을 말한다. 큰 참나무통에 들어있는 와인을 집에서 가져온 유리병에 원하는 만큼 퍼서 사는 방식이다.
호주 와인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리버랜드 와인을 고급 와인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와인 애호가들은 수집 목록에서 이 지역 와인을 지웠다. 주요 와인 서적들 역시 리버랜드를 고급 와인 산지 목록에서 제외했다. 리버랜드는 호주 와인 산업을 양적으로 키웠지만, 질적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렌마크 크릭 설립자이자 와인 양조가 앤드류 캐슬리는 벡의 ‘인지적 재구성’ 접근법을 와인 세계에 적용했다. 그는 리버랜드를 ‘싸구려 벌크와인 산지’가 아니라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을 품은 땅’으로 재해석했다.
캐슬리는 오래된 포도나무들과 독특한 토양에서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리버랜드 지역의 약점으로 꼽혔던 특성들을 재해석했다. 이 지역은 기후가 뜨겁고 건조해 일반적으로 고급 와인을 만들기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내리쬐는 햇빛이 포도나무에 곰팡이 질병을 줄이고, 일관된 숙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유명 와인 매체 와인 스펙테이터 인터뷰에서 “리버랜드가 가진 고유한 특성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며 “이곳의 석회질 토양, 넓은 일교차, 깨끗한 공기는 모두 좋은 포도를 키우기 알맞은 요소”라고 말했다.
이런 ‘인지적 재구성’을 바탕으로, 캐슬리는 전통적인 리버랜드 생산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그는 포도원 위치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포도나무가 햇볕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식재 밀도는 낮게 유지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매달리는 포도송이 양도 과감하게 제한했다.
양보다 질에 집중하는 방식은 이전까지 리버랜드에 흔치 않은 접근법이었다. 하지만 캐슬리는 이런 까다로운 방식이 이 지역 토양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양조 과정에서도 인위적인 맛보다 리버랜드 토양 특성을 최대한 잘 드러내기 위해 2~3년 사용한 참나무통을 썼다. 이렇게 몇 번 사용한 참나무통에 와인을 숙성하면, 와인에서 바닐라향이나 나무 내음보다 포도가 원래 품은 풍미를 더 잘 드러낸다.
리버랜드가 품은 가능성의 지도를 다시 그린 결과는 금세 나타났다. 렌마크 크릭 샤도네이는 국제 와인 대회에서 연이어 수상했다. 올해 2025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는 신세계 화이트 와인 부문 최고상 ‘베스트 오브 2025′를 차지했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 와인이 리버랜드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호주 저명 와인 평론가 제임스 할리데이는 이 와인을 “리버랜드가 품은 가능성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 와인”이라고 평했다.
렌마크 크릭이 거둔 성공은 리버랜드 전체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전까지 품질 좋은 와인에는 관심이 없던 다른 소규모 생산자들도 고급 와인 생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투자자와 와인 전문가들도 이 지역에 부쩍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렌마크 크릭 샤르도네는 고정관념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기어이 찾아낸 인지적 재구성의 산 증거다. 국내 수입사는 콜리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