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을 제대로 인정 받는 전문경영인이 유통업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엔 실적 기여도와 상관없이 기업 오너(소유주)의 급여가 가장 높게 책정됐지만, 이젠 달라지는 모양새다. 기업 경영이 고도화하면서 수완 좋은 전문 경영인을 찾기 어려운 만큼, 그들의 몸값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허인철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과 같은 급여를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허인철 부회장은 오리온에서 23억9700만원, 오리온홀딩스에서 12억3500만원을 받아 총 36억3200만원을 수령했다. 허 부회장의 급여는 이화경 부회장과 같다. 이는 오리온그룹 내규상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같은 규정에 따라 직급별로 동일한 수준의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고(故) 이양구 동양그룹(오리온의 전신) 창업주의 둘째 딸이다. ‘내 딸이라도 특혜는 없다. 경영자가 되려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창업주의 뜻에 따라 이 부회장은 평사원으로 시작해 20년 넘게 현장경험을 쌓은 후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이후 오리온그룹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뀌었고, 허 부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허 부회장은 삼성물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마트 대표이사까지 오른 인물이다. 오리온그룹에 따르면 그는 해외시장에서의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바이오 사업에 진출하면서 그룹 신성장 동력을 발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또 그룹 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영업이익률을 20%대 수준으로 높이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오리온그룹은 호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오리온그룹의 매출은 3조1043억원, 영업이익은 5436억원을 기록했다. 2023년과 비교하면 각각 6.6%, 10.4% 증가했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5332억원으로 전년 대비 38.5% 증가했다.
윌리엄 김 신세계인터내셔날 대표는 지난해 정유경 신세계 회장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았다. 윌리엄 김 대표의 지난해 급여는 41억5400만원이었다. 정유경 회장의 급여는 36억원이었다. 윌리엄 김 대표는 구찌와 버버리, 올세인츠 등 다양한 패션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패션 분야 전문가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실적은 지난해 주춤했지만 장기적으로 성과를 낼 것으로 그룹 내에서 기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인터내셔날 관계자는 “포트폴리오 리밸런싱(재조정), 글로벌 사업 추진, 디지털 역량 강화를 통해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인수합병(M&A)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로 회사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점을 고려했다”고 전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 1조3086억원, 영업이익 268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각각 전년 대비 3.4%, 44.9% 감소한 수치다.
CJ제일제당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지난해 CJ제일제당에서 받은 보수는 37억4900만원인데, 이 회장보다 더 받은 전문 경영인이 두 명있다. 식품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박민석 식품사업부문 대표가 대표적이다. 박 대표는 지난해 CJ제일제당에서 58억5200만원을 받았다. 강신호 CJ제일제당 대표이사(부회장)의 지난해 연봉도 45억7500만원으로 이 회장보다 많았다.
기업지배구조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이 같은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업 오너라고 해서 무조건 많은 급여를 책정하고, 아무리 능력이 좋더라도 전문경영인이 오너보다 적은 급여를 받는 관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립대 교수는 “능력이 좋다면 기업 오너가 경영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사회 의장 또는 배당을 받는 주주로 남는 편이 낫다”면서 “전문경영인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기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경영 구조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 헤드헌팅 전문업체 임원은 “업계가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업을 무리 없이 성장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기는 사실 쉽지 않다”면서 “실력 좋은 전문경영인을 찾으려는 기업은 많은 데 딱 적합한 인재를 찾기는 어렵다. 한 번 능력이 좋은 인재로 분류되면 그의 몸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