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상징하는 술 하면 통상 보드카를 떠올린다. 러시아에서 보드카는 서민의 술이다. 제정 러시아 황제들과 공산당 서기장들은 주로 와인을 마셨다.

모스크바 크렘린궁 지하에는 지금도 거대한 와인 저장고가 있다. 15세기 이반 3세 시대 설계도에 따르면 이 공간은 크렘린궁 지하에서 모스크바강 하류로 미로처럼 이어진다.

다만 어떤 와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른다. 러시아 정부는 이 저장고에 보관 중인 정확한 와인 규모와 소장 와인 가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와인 업계 전문가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 폭격을 피해 옮겼다는 제정 러시아 시대 와인만 모아도 얼추 10만 병이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러시아 제국 초대 황제 표트르 대제는 유명한 와인 애호가였다. 그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실 와인 저장고를 보고 매료됐다. 순례를 마치고 크렘린궁에 돌아온 그는 프랑스 왕실을 본떠 저장고를 지었다. 안에는 값비싼 프랑스산 와인으로 채웠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왕실에서 소믈리에를 초빙할 만큼 이 저장고에 공을 들였다.

러시아 혁명 후 왕실은 뒤집혔지만, 이 와인 저장고가 품은 가치는 바뀌지 않았다. 레닌은 와인을 ‘제국주의의 유산’이라며 폐기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재무인민위원이었던 소콜니코프가 “국가의 보물”이라고 반박하며 이 와인들을 지켰다.

이후 차르(러시아 황제)들이 은밀하게 마셨던 와인 대부분은 공산당 간부와 소비에트 연방 해외 공관에 할당됐다. 일부는 공산당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중요한 ‘무역 수단’으로 쓰였다. 독재자 스탈린은 1936년 와인 저장고를 보호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연합군이라고 좋은 와인을 마다할 리 없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1945년 얄타 회담 당시 처칠과 루스벨트는 크렘린궁 와인 저장소에서 숙성한 오래된 와인을 마시며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는 냉전기에 접어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세계 1·2위 와인 생산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거리를 뒀다. 1950년대 공산당 제1서기였던 흐루쇼프는 프랑스 부르고뉴나 보르도 와인에 맞서 ‘순수한 소비에트 연방 와인’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기후가 좋고, 토양이 비옥한 몰도바가 그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는 몰도바를 ‘소비에트 연방의 와인 셀러’로 지정했다. 1970년대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몰도바에 대규모 포도 농장을 조성하고 최신 양조 설비를 들여왔다.

‘밀레스티 미치(Mileștii Mici)‘는 이런 야망을 모아 만든 거대한 와인 저장고다. 석회암을 캐던 깊은 광산을 와인 저장고로 바꿨다. 지하 저장고 길이만 200km에 달한다. 기네스북은 이곳을 세계 최대 와인 저장고로 공식 인증했다. 이곳에 보관 중인 와인을 모두 합치면 200만 병으로 추정된다.

그래픽=손민균

몰도바 와인은 2006년을 기점으로 급격한 전환점을 맞았다. 2006년 3월 러시아는 몰도바 와인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몰도바가 서방 국가들과 가까워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러시아는 2013년에도 같은 조치를 반복했다. 몰도바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몰도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두 나라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몰도바는 러시아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러시아는 재차 강도를 높인 수입 금지 조치로 대응했다.

몰도바는 인구가 350만 명인 작은 나라다. 심지어 바다를 곁에 두지 않은 내륙국이다. 수출 80%는 인근에서 가장 큰 국가인 러시아에 의존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몰도바 와인 수출액은 2005년 3억5000만달러였다. 하지만 2006년 러시아 정부가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린 직후, 1억3700만달러로 거의 3분의 1토막이 났다. 수입 금지 직후 와인 농가 10곳 중 4곳이 문을 닫았다. 와인 관계 업종 전반에 걸쳐 수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동시에 거리로 나앉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몰도바는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 다른 국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세계 시장에서 겨루기 위해 품질 관리 시스템을 EU 기준으로 개선했다. 전문가들은 몰도바 와인 역사가 2000년이 넘었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몰도바 와인 생산자들이 로마의 와인 양조법, 슬라브의 농사 기술, 오스만의 미식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저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저명한 영국 와인 평론가 오즈 클라크는 2023년 디캔터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몰도바 와인은 20유로(약 2만8000원)대 가격에서 프랑스 보르도, 스페인 리오하 와인들과 당당히 경쟁한다”고 말했다.

사피엔스는 몰도바 최대 와이너리 푸카리가 슈테판 보다 지역에서 빚는 와인 브랜드다. 흑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슈페판 보다 지역은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이 지역 토양은 부드러운 석회암이 풍부해 포도나무가 상대적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기 좋다. 깊이 내려간 뿌리는 미네랄을 충분히 흡수해 와인 풍미에 복합미를 더해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피엔스 페타스카 나그라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페타스카 나그라(Fetească Neagră) 품종 포도로 만든다. 페타스카 나그라는 몰도바 말로 ‘검은 처녀’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 포도는 까맣게 익어가면서 섬세한 향기를 품는다. 혹독한 추위와 병충해에도 강하다.

몰도바 농부들은 이 품종이 외세 압박 속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유지해 온 몰도바 민족성을 닮았다고 말한다. 극한의 환경을 이겨내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완성한 이 와인은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화강주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