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271560)이 15일 제약회사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레고켐바이오) 지분 25%를 5500억원에 사들이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2020년 오리온이 바이오 분야로 진출한 이후 3년 3개월 만에 첫 대규모 인수합병(M&A)이다.
2005년 설립한 레고켐바이오는 차세대 항암치료제로 불리는 항체·약물 접합체(ADC) 기술과 합성 신약 관련 기술을 보유한 제약사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기술이전 계약 총 13건을 맺었고, 기술이전료를 전부 합치면 8조7000억원에 달한다.
이번 인수는 오리온이 바이오 산업 진출 이후 처음으로 진행한 대규모 투자다. 오리온은 지난 2020년 10월 오리온홀딩스와 산둥루캉의약과 합자 계약을 맺고 다음 해 3월 산둥루캉하오리요우라는 합자 법인을 설립했다. 현재 중국에서 대장암 체외 진단 임상을 진행 중이다. 900억원 규모 결핵 백신 공장 준공도 앞두고 있다.
한국에는 2022년 12월 하이센스바이오와 합작해 오리온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해, 바이오 시장에 진출했다.
바이오사업은 지난한 임상과정을 수차례 진행해야 겨우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난다. 다른 산업보다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투자와 과감한 결정이 필요하다.
대신 이미 기간 산업에 속한 유통대기업 주력 산업들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가파르다.
우리나라 의약품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약 23조원으로 글로벌 시장(1418조원) 점유율1.6%에 그쳤다. 반면 국내 의약품 시장 최근 5년간 연 평균 성장률은 5.2%를 기록했다. 식품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비해 성숙도는 낮고, 성장 가능성은 높은 시장이라는 의미다.
이 때문에 바이오사업은 과감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끌 수 있는 오너가(家)가 주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롯데그룹은 2022년 6월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새로 세우면서 바이오 사업에 뛰어들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이듬해 신년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분야에서는 선도기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핵심역량을 쌓아야 한다”고 당부하며 바이오 산업을 강조했다.
이어 지난해 12월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이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 자리를 겸직하는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CJ 역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미래성장산업으로 웰니스(Wellness) 분야를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2022년 1월 CJ바이오사이언스를 출범했다.
CJ바이오사이언스는 CJ제일제당(097950)이 2021년 10월 인수한 마이크로바이옴 전문회사 천랩과 기존에 보유한 레드바이오(제약·헬스케어) 자원을 통합해 설립한 회사다.
그 밖에도 식품제조기업 대상(001680)과 유통전문기업 현대백화점(069960)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바이오 산업을 점찍었다.
대상홀딩스(084690)는 지난해 12월 항진균제 신약 개발 기업 앰틱스바이오와 총 75억원 규모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대상은 항노화와 면역 분야 신약 쪽으로 바이오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현대백화점그룹 현대바이오랜드는 지난해 발목관절치료제 ‘카티스템’을 앞세워 줄기세포치료제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현대바이오랜드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신약 개발 대신 줄기세포치료제 판매 같은 의료 소재 분야에 집중할 방침이다.
오너 2세 김남정 부회장이 이끄는 동원그룹 역시 지난해 인플루엔자 백신과 일본뇌염 백신을 만드는 보령바이오파마 인수에 참여했다. 동원그룹은 막판에 인수 의사를 철회했지만, 여전히 유망 신기술을 중심으로 한 장기적 인수합병 기회를 물색하고 있다.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은 마진이 적고, 차별화가 어려워 후계자 경영 능력을 평가하는 변별력이 떨어진다. 유행이나 흐름 역시 빠르게 변해 진득하게 성과를 내기 어렵다.
반대로 바이오산업은 수천억에서 조 단위를 오가는 비용, 최소 3년에서 길게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해 그룹 몸집을 꾸준하게 불리기 좋다. 경영 후계자 입장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산업 이해도를 높이면서 동시에 경영 능력까지 키울 수 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겪는 성장통을 기존 주주 혹은 투자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레고켐 인수 발표 이후 첫 거래일인 16일 한국거래소 주식시장에서 오리온 주가는 오전에만 17% 넘게 급락했다. 제과 사업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던 기업이 바이오 사업에 갑자기 수천억원을 투자하면 실적 안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박상준 키움증권 연구원은 “제과 사업 회사가 바이오 사업 투자를 확대하면서 투자포인트가 희석됐고, 이종 사업 투자에 따른 시너지 효과에 대한 의문도 커졌다”며 “만약 레고켐바이오 실적이 오리온과 연결 회계 처리된다면 연결기준으로 오리온 영업이익은 10% 이상 낮아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