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들이 부르는 주옥 같은 노래, 배우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연기는 이따금 우리를 취하게 한다. 그럼 그들이 만드는 술은 어떨까.

국내 주류업계에서 연예인을 앞세운 광고는 고전적인 마케팅 방식이다. 유명인을 브랜드 홍보대사로 임명해 입소문을 내는 방식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스타는 조연이고, 술이 주연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소한 술과 스타가 동등한, 때로는 술보다 스타가 더 돋보이는 주류 브랜드가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와인 티스팟(T’SPOT) 보르도가 시음을 위해 도착했다. 너무 만족스럽다.”
배우·빅뱅 멤버 탑(최승현)

보이그룹 빅뱅 출신 탑은 소셜미디어서비스(SNS)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1500만 명에 달한다. 팔로어 수만 봐도 전 세계적인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올해 4월 이후 올린 인스타그램 공개 게시물 25개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개가 본인이 준비 중인 와인에 관한 이야기다.

다음달 발매하는 탑의 와인 티스팟은 레드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 두 종류다. 레드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 지방 유명 와인 브랜드 ‘튀느뱅(Thunevin)’에서 만든다. 이 브랜드는 고전적인 기법에서 탈피한 창조적인 양조 방식으로 명성이 높다.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튀느뱅의 와인 메이커 장 뤽 튀느뱅을 “전통과 관습의 둘레에서 벗어나, 독창성으로 성공한 고집스러운 괴짜이자 천재”라고 평가했다. 탑 역시 전형적인 아이돌 연습생의 길을 걷기 전 언더그라운드에서 힙합 음악 활동을 하던 래퍼였다.

탑은 이 와인 레이블(겉표지)에 ‘탑이 큐레이팅 했음(curated by T.O.P)’이라고 적었다. 와인업계에서는 보통 큐레이팅이라는 단어 대신 프로듀스(produc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굳이 큐레이팅이라는 단어를 쓴 배경에는 마치 큐레이터가 미술관에 전시할 예술품을 고르듯, 모든 과정에 탑 본인이 참여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탑 와인에 앞서 우리나라 주류업계에 ‘스타가 만든 술’이라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은 유명 가수 박재범이다. 그가 올해 2월 선보인 원소주는 국내 증류식 소주 역사를 새로 썼다. 원소주 시리즈는 출시 이후 약 6개월 만에 100만병이 넘게 팔렸다.

원소주를 만드는 원스피리츠 대표이사는 박재범 본인이다. 스스로 경영 일선에 나서는 대주주기도 하다. 그는 2019년부터 전통적인 증류 방식으로 만든 본인 소주 브랜드를 만들 구상을 해왔다. 브랜드 인지도가 궤도에 오른 지금도 세밀한 사항을 직접 점검한다.

원소주 관계자는 “(박 대표이사가) 음악방송 활동을 하는 중에도 정기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할 뿐 아니라, 공장이 있는 원주까지 내려와서 직접 농사에도 참여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며 “해외 출장 때는 직접 가방에 원소주를 넣고 다니면서 해외 팬들, 관계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은현

회사 설립부터 제품 기획·제조·마케팅에 이르는 전 과정을 스타가 직접 하는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미국 같은 거대 주류 시장에서는 꽤 자주 있는 일이다.

할리우드 스타 가운데 술로 가장 성공한 사례는 조지 클루니다. 조지 클루니는 2013년 테킬라 회사 ‘카사미고스’를 세웠다.

미국 연애 전문매체 피플에 따르면 그는 당시 나이트클럽 사장이자 친구 란데 거버와 멕시코를 여행하다 ‘숙취 없는 테킬라는 없는가’라는 주제로 가열 찬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긴 의논 끝에 직접 테킬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저렴한 술’이었던 테킬라는 스카치 위스키에나 어울릴 법한 클루니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맞물려 미국 시장에서 새롭게 인기몰이를 했다.

4년 뒤 2017년 글로벌 주류회사 디아지오는 카사미고스를 10억달러, 당시 금액 기준 1조1200억원에 사들였다. 미국 테킬라 브랜드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평소 클루니가 받는 고액 영화 개런티를 감안해도 이 정도면 본업을 넘어선 부업에 가깝다.

이후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는 본인만의 테킬라 브랜드 세우기 붐이 일었다. 영화 한 편당 가장 높은 개런티를 받는 액션 배우로 유명한 드웨인 존슨(더 락)의 ‘테레마나’, 현존하는 세계 최고 모델 켄달 제너의 ‘818′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 브랜드는 모두 짧고 둥글었던 전통 테킬라 병 대신 버번 위스키나 스카치 위스키를 담는 긴 병을 사용한다.

광고 역시 본인이 직접 등장해 영화의 예고편처럼 감각적으로 꾸민다. 대신 결코 스타 마케팅의 틀 안에 갇히진 않는다.

반대로 본인이 나고 자란 지역색을 뚜렷하게 강조한다. 존슨이 만든 브랜드 테라마나에서 ‘마나’는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뜻하는 단어다. 폴리네시아는 존슨 어머니의 고향이다.

제너의 브랜드명 818 역시 고향 캘리포니아주 칼라바사스(Calabasas)의 지역 코드 번호다.

미국 최대 주류배달 플랫폼 드리즐리는 올해 내놓은 소비자 리포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 목록에서 친숙한 얼굴이 보증하는 브랜드, 거기서 나온 신제품들이 많이 보였다”며 “복잡한 주류 시장에서 대다수가 알아차릴 만한 특별한 한 병을 찾는 이들이 웃돈을 얹어서라도 유명인들의 주류 브랜드를 고른다”고 분석했다.

유명 스타들이 만든 술은 대체로 발매 초기 주류 시장에 연착륙한다. 그러나 이름에 맞는 주질, 평소 본인이 쌓아온 이미지에 맞는 주종을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인기가 금새 사그라든다.

가령 축구스타 베컴이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전 과정에 참여했던 위스키 헤이그클럽은 디아지오라는 대형 글로벌 주류업체를 등에 업고도 우리나라 시장에서 매출 참패를 겪었다.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카메론 디아즈가 선보인 와인 브랜드 아발린 역시 와인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면치 못했다.

한국베버리지마스터협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도 소규모 양조 관련 규정이 이전보다 완화되면서 유명인들이 자본을 투자하거나, 직접 나서서 술을 만들 기회가 생겼다”며 “그러나 해당 스타 인지도가 충분히 높지 않거나, 팬층이 두텁지 않은데도 주류 시장을 쉽게 보고 덤빈다면 안티팬과 기존 주류 애호가들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