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 이후 영국을 포함한 호주·뉴질랜드 등 영(英)연방 국가를 중심으로 여왕이 사랑했던 ‘뒤보네’라는 술이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뒤보네는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다. 본래 1846년 나폴레옹 3세 재임 시절 프랑스 정부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하던 병사들이 말라리아에 자주 걸리자, 저렴한 포도주에 말라리아에 효력이 좋은 약용 성분 퀴닌(금계랍·金鷄蠟)을 섞어 만들었다.

퀴닌이 가진 엄청난 쓴 맛을 지우기 위해 각종 허브와 향신료를 넣고 사탕수수로 단 맛을 가미하는데, 이 달콤함 덕분에 전쟁 이후 대중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맛은 알콜향이 살짝 가미된 쌍화탕, 혹은 탄산이 빠진 활명수에 가깝다.

편하게 마시는 술인만큼 가격도 싼 편이다. 평소 영국에서는 대형마트 기준 750밀리리터 한 병에 10파운드(약 1만5000원)면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여왕 사후 뒤보네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살아 생전 여왕이 가장 즐겨 마시던 술을 찾는 소비자가 한순간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은현

영국 최대 유통업체 테스코는 지난 1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을 앞두고 뒤보네가 모든 매장에서 품절됐다고 밝혔다. 고급 식품점 웨이트로즈도 이보다 먼저 뒤보네 재고가 떨어졌다고 공지했다.

영국 아마존에서는 여왕 사후 뒤보네가 주류 부문 판매량 1위 상품 자리에 올랐다. 영국이 자랑하는 스카치위스키와 유명 맥주들을 모두 제친 결과다.

그나마도 현재는 구매가 불가능하다. 아마존은 재입고 여부를 묻는 소비자 질문에 “우리도 언제 다시 이 술이 들어올 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일부 영국 내 온라인 주류 판매점은 뒤보네에 평소보다 5배가 넘는 가격표를 붙였다.

호주와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 소속 국가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뉴질랜드 대형 주류전문점 파인오와인은 “여왕 사후 전국 매장과 온라인에서 뒤보네 판매량이 10배 넘게 늘었다”고 밝혔다.

호주 최대 주류 도매상 댄 머피도 여왕 사망 이후 3일 동안 뒤보네 판매가 이전 주보다 465% 증가했다고 말했다.

영국 식(食)문화는 예전부터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주변 국가들이 조롱하는 단골 소재다. 하지만 왕실에서 즐기는 음식은 예외였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70년 즉위 기간 동안 전 세계 식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얼그레이 차나 스콘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전에는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음식이 아니었지만, 여왕 재임 70년에 걸쳐 영국 왕실에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뒤보네도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상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덕에 이름을 알렸다. 여왕은 금욕적인 성격이었지만, 이 뒤보네에 진을 섞은 ‘진 앤 뒤보네’ 칵테일은 평생 즐겨 마셨다.

여왕이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 칵테일 이름이 ‘더 퀸즈 뒤보네’로 바뀌었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이 술은 진 앤 뒤보네라는 원래 이름보다 이제 ‘더 퀸즈 뒤보네’로 불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지난해 초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기 직전까지 뒤보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영국 왕실은 2020년 더 퀸즈 뒤보네에 쓸 진을 아예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이 진은 여왕이 거주하던 런던의 한 정원에서 가져온 산사나무 열매와 뽕나무 잎, 월계수 잎을 넣어 만든다. 지난해에는 뒤보네에 ‘퀸 로얄 워런트’를 수여했다. 로얄 워런트는 식품 업계에서 영국 왕실이 품질을 인정했다는 사실상 최고 등급 품질 보증서로 통한다.

다만 국내 주류업계는 이번 뒤보네 열기에서 다소 소외되는 분위기다. 뒤보네의 낮은 인지도와 식전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 음주 문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상대적으로 느슨한 연대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텐더 업계에 따르면 더 퀸즈 뒤보네는 국내 일선 바에서 그렇게 주문량이나 인지도가 높지 않은 칵테일에 속한다.

임해종 블루브릭바 지배인은 “이전부터 뒤보네가 유럽권을 중심으로 거의 전량 소진되는 탓에 국내 수입 물량이 가뜩이나 많지 않았는데 이제 이전 수입 물량마저 끊길까 우려스럽다”며 “베르무트(Vermouth)처럼 뒤보네와 맛과 향이 비슷한 다른 술로 대신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