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현금 쓰나요?”
요즘 사람들은 식당에서의 주문이나 백화점에서 제품을 구매할 때 휴대전화의 페이(pay)나 신용카드, 체크카드 등을 이용한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 영국, 중국, 호주, 노르웨이 등도 현금결제 비중이 10% 미만으로 떨어지는 추세다.
현금 사용의 감소로 한국은행의 화폐 발주량도 급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현금 결제 비중은 2019년 17.4%에서 2021년 14.6%까지 떨어졌다.
이같은 추세는 화폐 제조 공기업인 한국조폐공사(韓國造幣公社)’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폐공사는 2007년 한 해 동안 20억 장의 은행권과 5억7000만 장의 주화를 한국은행에 공급했으나, 지난해엔 은행권 3억4500만장, 주화는 4100만장만 공급했다.
조폐공사도 사업의 구조적 변화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화폐 제조가 사양화하면서 조폐공사도 문을 닫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하지만, 이 책 저자들은 “실물화폐인 현금의 종말이 곧, 조폐공사에 위기는 아니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조폐공사는 ‘돈만 제조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폐공사는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훈장 등의 기술을 활용해 700여종의 다양한 제품을 제조하고 있다. 화폐에 적용된 각종 보안 기술, 특수 압인 기술을 활용한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해 온 것이다. 2020년부터 화폐 외 제품 매출이 조폐공사 전체 매출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기념주화, 골드바, 전자여권, 모바일 신분증, 모바일 온누리상품권 등이 조폐공사의 대표적인 화폐 외 제품들이다.
조폐공사는 기념주화와 기념 메달도 제조한다. 1975년 한국은행 창립 25주년 기념 은 소재 메달을 시작으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시상 메달과 2019년 서번트 증후군 아티스트가 참여한 ‘찬사의 재능’ 시리즈 메달 기획까지 계속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한국의 메달 ‘호랑이’ 시리즈와 치우천왕 등 고전신화를 재해석한 주화도 제조했다.
‘K-예술형 주화’도 제조했다. 조폐공사는 2023년 한국 아이돌그룹 BTS(방탄소년탄) 데뷔 10주년을 맞아 특수 압인 기술을 적용한 기념 메달을 기획하는 한편, 대한민국 축구계의 아이콘 손흥민 선수 기념 메달을 제조하기도 했다. ‘K-컬쳐’에 기반한 사업 다각화와 공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겨냥한 제품이다.
책에는 세계 최초로 화폐에 적용되는 기술을 활용한 요판화 사업 추진 내용도 담겨 있다. 은행권을 만들 때 쓰는 고도의 기술인 ‘요판 인쇄’를 활용해 한국의 대표 유물과 미술품을 주제로 요판화를 제작했다. 선과 점만으로 작품을 구현하고, 위조 방지 기술을 활용해 작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더해줬다.
조폐공사는 인왕제색도 요판화를 대형, 중형, 소형으로 3개 크기로 한정 판매했는데 완판됐다. 올해는 이중섭 작가의 황소, 맹호도, 광복80년 기념 요판화도 출시한다. 조폐공사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등과 업무 협약을 체결해 소장 작품을 활용한 문화사업 추진에 협력한다.
저자인 성창훈 조폐공사 사장은 “전 세계적으로 조폐 기관이 유명 작가의 명화를 활용해 화폐 요판화 사업을 추진한 사례는 없다”면서 “국내외 유명 작품을 활용하면서 문화적 가치를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화폐 생산 후 버려지는 부산물을 활용한 사례도 눈에 띤다. 조폐공사에 따르면 연간 화폐 제조와 유통 과정 중 발생하는 부산물은 약 500톤에 달한다. 이는 10톤 트럭 50대 분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조폐공사는 화폐 부산물을 활용해 가치 있는 제품을 생산한다. 돈 달력, 돈 방석, 돈 볼펜 등 폐기된 돈을 재활용한 굿주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다른 저자인 우진구 조폐공사 실장은 “연말까지 화폐 부산물로 만든 일부 화폐 굿즈를 판매하고 올해는 본격적으로 사업화할 계획”이라면서 “부산물 재활용으로 탄소 중립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폐 제조업은 ICT 기반으로 전환하는 변곡점에 서 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연구하고 있다. CBDC가 적극 도입될 경우, 현금 사용량은 더욱 급감할 것이다.
화폐 감소라는 위기 속에서 조폐공사가 추진한 ‘TSM’(신뢰기반서비스 관리)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때 개발된 블록체인 기술은 모바일 상품권 사업의 토대가 됐다. 오랫동안 고전해온 불리온 메달 사업의 경험은 예술형 주화 사업을 추진하는 기반이 됐다. 불리온은 각국 조폐 기관이 국가 상징물을 주제로 만든 금·은 소재 주화나 메달을 말한다.
조폐공사는 ‘혁신 공기업 1호’라고 자신한다. 공기업이라는 우산 속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혁신 사례는 일반 독자는 물론 다른 공기업에도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성창훈, 우진구, 정재광 지음|매일경제신문사|280쪽|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