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바둑계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승부’가 26일 막을 올렸다. 4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서일까.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기대가 뜨겁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개봉을 하루 앞둔 25일 오후 6시 기준 승부는 예매율 27.2%로 전체 1위를 기록, 경쟁작 백설공주, 진격의 거인, 미키17 등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 바둑기사 조훈현(이병헌)과 그의 제자 이창호(유아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국수(國手) 조훈현은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최초로 9단을 획득한 기념비적 인물. 만 9세의 나이에 프로에 입문한 그는 왕위전, 명인전 등 각종 대회를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실력만큼이나 자부심도 대단하다. 한 후원사 회장이 바둑을 ‘돌놀이’로 부르며 낮잡아 보자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모습에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영화 '승부' 속 조훈현 9단. /바이포엠스튜디오

연일 바둑사(史)에 신화를 써내려가던 조훈현을 가로막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제자 이창호. 9세의 나이에 바둑계에 발을 들인 그는 혹독한 수련을 거쳐 스승의 유일무이한 라이벌로 성장한다. 조훈현의 바둑이 빠르고 화려하다면 이창호의 바둑은 담담하고 묵직하다. 소위 ’80살 먹은 노인네’를 연상시키는 신중한 수읽기가 특징이다.

인물 자체도 바둑 스타일과 닮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느린 말투, 앙다문 입술을 고수하던 그는 끊임없는 분석 끝에 마침내 스승을 꺾고 1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조 9단이 예상치 못한 실패를 맞닥뜨리면서 영화는 본막에 접어든다. 제 아무리 ‘신(神)적’인 존재라 해도 신이 될 수는 없는 법.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굴욕을 맛본 조훈현은 터널같은 슬럼프에 빠진다. 대국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으며 기권패를 거듭, 술독에 빠져 길거리를 전전하기도 한다.

절망에 빠진 그를 깨운 것은 라이벌인 남기철 9단의 한 마디다. 평소 적으로만 마주했던 남 9단은 “비겁하게 피하지 말라”며 조훈현을 일깨운다. “피하려고 숨을수록 궁지에 몰리는 게 바둑”이라는 말은 인생을 바꾼 깨달음이 된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조훈현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바둑판 앞에 앉는다. 먼지 쌓인 책을 다시 펼치고 자신의 바둑을 연구하며 재도약을 준비한다. 한때 매 경기마다 입에 물던 담배 대신 캐러멜을 꺼내는 장면은 그가 겪어낸 인고의 시간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영화 ‘승부’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는 바둑을 소재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생과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한다. 오늘 이겨도 내일 질 수 있고, 오늘 지더라도 내일 이길 수 있는 게 프로기사의 숙명.

내일도, 모레도 또다른 승부를 이겨내야 하는 것은 바둑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비록 오늘의 승부에서 실패를 맞이했더라도 자신을 믿고 내일의 승부를 준비해야 한다는 삶의 교훈을 영화는 전달한다.

바둑을 몰라 관람을 망설이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치열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면 정성이 담긴 ‘한 수’가 주는 감동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세, 초읽기, 패착 등 일상 속에 자리잡은 친숙한 바둑용어들의 어원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영화의 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