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천 칼럼] '메이드 인 재팬' 없이 살아보기

입력 2019.08.13 06:00

미국의 프리랜서 경제기자인 사라 본지오르니는 2004년 말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뒤 집안에 뒹굴고 있는 물품이 대부분 중국제(製)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본지오르니는 가족과 함께 2005년 한해 동안 중국제품 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세계화’와 ‘중국 경제의 부상’이 개인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매번 물품을 살 때마다 중국산 여부를 확인하고 대안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새로 산 제품에 붙어있는 중국 상표를 떼어내 본지오르니를 속이려고 하는 남편과 중국산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설득하고 달래느라 마음 고생을 했다.

본지오르니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없이 살아보기’라는 책에서 "반항적인 배우자와 아이가 없고, 싼 구두와 전자제품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면 중국제 없이 사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억지로 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었다. "중국산 보이콧은 우리 가족이 중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했다.

본지오르니의 책은 출간 직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국내 한 방송사는 2007년에 한국, 미국, 일본의 평범한 가정을 선정해 집안에 있는 중국산 제품을 모두 없앤 후 한달간 생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없이 살아보기’의 국가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 등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에 항의하는 불매운동 열기가 뜨겁다. 과거 역사교과서와 독도 문제 등으로 인한 몇 차례 일제(日製) 불매운동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브랜드만 가리는 데서 더 나가 바코드로 원산지를 체크하고 제품의 성분까지 따지고 있다. 인터넷에는 식품회사들의 일본산 식품첨가물 수입 내역을 담은 자료가 돌아다니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홈페이지를 보고 쌀겨추출물, 탄산칼슘, 복숭아향, 레몬향 등 수십가지 일본산 원료 수입 현황을 정리했다고 한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햇반도 일본산, 오뚜기 라면도 일본산’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돌기도 한다. CJ제일제당의 햇반에는 일본산 미강 추출물이 들어간다. 미강은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가장 고운 속겨로 즉석밥의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원료다. 함량이 0.1%에 지나지 않는 미강 때문에 대부분의 원재료가 국산인 햇반이 도마에 올랐다.

오뚜기 라면에 들어가는 글리세린 지방산 성분,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의 녹차 분말, 매일유업과 서울우유 제품의 향신료 성분 등도 마찬가지다. 극소량의 일본산 원료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란으로 해당 기업들이 곤욕을 치렀다.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현상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일제 불매운동이 과거보다 정교해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이 원료, 소재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우리도 제품의 성분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일본산 논란에서 자유로운 한국 기업과 제품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0.1%의 미강 성분이 포함된 햇반이 못마땅하다면 일본산 소재를 이용해서 만드는 반도체와 그 반도체가 들어간 제품은 어떻게 봐야 하나.

제품 브랜드는 물론 성분까지 모두 문제삼아야 한다는 원리주의적 주장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런 논리라면 삼성과 LG의 휴대폰과 TV 등 가전제품도 불매운동의 타깃이 돼야 한다. 자동차·기계·화학을 비롯해 다른 제조업 분야 제품들도 마찬가지다. 자존심 지키려다 한국 경제가 망하는 꼴이 될 수 있다.

KBS 메인뉴스(뉴스 9) 진행자가 뉴스를 마치며 "제가 들고 있는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라고 해명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볼펜이 일제가 아니냐는 시청자의 항의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메인뉴스를 촬영한 카메라는 일본 제품으로 가격이 볼펜의 수천배에 이른다. 그 카메라 앞에서 볼펜이 국산이라고 강조한 것은 코미디나 다름 없다.

볼펜 한 자루도 용납하지 못한다면 TV 뉴스를 촬영한 일제 카메라도 문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병원의 의료장비와 처방약 중에도 일제가 많은 데 이건 괜찮은 건가.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철두철미하게 일제 불매운동을 하려면 아예 문명세계를 떠나야 할 것같다.

일본 아베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을 치고 들어온 것은 세계 경제에 대한 도발이고 자해(自害) 행위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소재기업들이 해외공장을 통해 한국에 우회수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결정에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 따랐던 일본 기업들의 전통과 관행이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이 좀더 전략적으로 대응할 여지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막무가내 자충수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대통령도 이제는 "우리 대응이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불매운동을 하더라도 세계 경제가 글로벌 공급망으로 연결돼 서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의 퇴행적 구호로 애꿎은 국내기업들을 들볶는 일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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