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면 일손 놓기 시작하는 신고리 건설현장

입력 2019.08.12 03:09

탈원전 이어 주 52시간제 직격탄 맞은 신고리 5·6호기

지난 5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 인근의 현장 근로자 숙소.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벌써 퇴근한 근로자들로 북적였다. 지난해 7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원전 건설 현장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면서 근로자들의 퇴근 시간이 앞당겨진 것이다. 서울에서 온 목수 김모(62)씨는 "해가 중천인데 공사 현장이 문을 닫으니 억지로 퇴근했다"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나라에서 뜬금없이 야근하지 말고 저녁 여유를 즐기라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라고 했다. 과거 김씨는 야근 등을 통해 한 달에 5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까지 벌었지만, 주 52시간제 이후 월수입이 400만원 수준으로 줄었다.

신고리원전 5·6호기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탈(脫)원전 정책으로 공사를 중단시키고, 공사 재개 여부에 대한 공론화를 진행하면서 4개월간 공사가 중단됐다. 이번엔 주 52시간제 여파로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야근이 없어져 수입이 줄어든 현장 근로자들의 임금 감소분을 보전해주던 협력업체들이 "발주처(한국수력원자력)나 시공사(삼성물산 등)가 임금 보전을 해주지 않으면 공사를 하기 힘들다"며 집단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론화 위기 넘자 '주 52시간제' 폭탄

원전 구조물 공사를 담당하는 어드밴건설 관계자는 "근로자 400여명에게 일당으로 16만원 정도를 지급해왔지만 야근이 사실상 금지된 지난해 7월부터는 임금을 줄이지 못해 매달 2억원을 인건비 보전으로 지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에서 거대한 크레인들이 원전 주요 구조물들을 짓고 있다. 2016년 9월 시작된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공사는 2017년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공기(工期)가 지연된 데 이어, 지난해 7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면서 또 한 번 공사 중단 위기를 맞았다.
지난 7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에서 거대한 크레인들이 원전 주요 구조물들을 짓고 있다. 2016년 9월 시작된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공사는 2017년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공기(工期)가 지연된 데 이어, 지난해 7월부터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면서 또 한 번 공사 중단 위기를 맞았다. /한국수력원자력

철골 구조물 작업을 맡은 다른 업체는 지난 1년간 근로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형태로 줄어든 임금을 보상해 왔는데 이 금액도 매달 4000만~5000만원에 달한다. 그러나 시공사 측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주 52시간 시행 초기 시공사 측에서 '한수원과 협의해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1년 동안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현재 주 52시간제를 적용받는 300명 이상 업체는 건설 현장에 참여하는 30여 곳 중 12곳으로 알려졌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협력업체들은 이미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2017년 6월 정부의 탈(脫)원전 공약에 따라 공사 자체가 백지화될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공론화위원회 권고로 일시 중단됐던 공사는 4개월 만에 재개됐지만, 공사 중단 여파로 발생한 협력업체 피해액이 1200억원이 넘었다. 한수원 측은 지난해 3월 증빙서류를 갖춘 협력업체들에 대해서는 보상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한수원 무관심 속 협력업체들 "이대로면 망한다"

협력업체들이 "주 52시간제 때문에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정부·발주처(한국수력원자력)·시공사(삼성물산 등)는 지난 1년간 근로자들 임금 보전과 관련해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인건비 보전으로만 1년 동안 수십억원을 썼는데,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며 "시공사나 정부에서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공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5일 오후 5시쯤 울산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 근로자 숙소 앞에 차량들이 주차돼 있다. 주 52시간제 실시 이후 야근이 사라지면서 원전 건설 근로자들 대부분은 5시쯤이면 퇴근한다.
지난 5일 오후 5시쯤 울산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 근로자 숙소 앞에 차량들이 주차돼 있다. 주 52시간제 실시 이후 야근이 사라지면서 원전 건설 근로자들 대부분은 5시쯤이면 퇴근한다. /김선엽 기자

참다 못한 협력업체 일부는 지난주 "주 52시간제 시행에 따른 비용 증가를 보전해주지 않으면 공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공문을 시공사인 삼성물산에 제출했다. 공사 중단 위기가 닥치자 양측의 협상이 시작됐다. 어드밴건설 등 협력업체 3곳은 삼성물산과 협상을 통해 '올해 연말까지는 공사 중단 선언을 보류한다'는 데 합의했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지원 액수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연말까지 삼성물산이 한수원 등과 협의해 협력업체의 인건비 상승분에 대한 지원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했다.

◇사라진 ‘원전 건설’ 특수

주 52시간제 도입은 신고리원전 5·6호기 인근 마을 상권(商圈)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이날 저녁시간에 근로자 숙소 아래층에 있는 장어집에 식사를 하러 온 근로자들은 서너명에 불과했다. 주인 우영옥(62)씨는 “작년부터 매출이 내리막길”이라며 “근로자들은 수입이 줄어 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을 여건이 안 되는 데다, 주말 근무도 못 하다보니 금요일만 되면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주말 특수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원전 후문 인근에서 간이 식당을 하는 인삼택(63) 신고리 5·6호기 인접식당협의회 사무국장은 “주 52시간제 이후 저녁 회식이 아예 사라졌고, 밤에 잔업하는 근로자들이 먹던 야간 도시락 수요도 끊겼다”며 “월 2000만원이던 매출이 1300만원 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더 멀리 떨어진 식당들은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주 52시간제 시행 전 총 16곳이었던 협의회 소속 식당 중 4곳이 최근 파산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원전 공사 현장은 보통 최소 5~6년 동안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데다 일당도 높아 일용직 근로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이젠 옛말이 됐다”며 “지난 1년간 우리 회사에서 일하던 근로자 20~30%가 공사 현장을 떠났다”고 했다. 충남 천안에서 온 근로자 한모(56)씨는 “고향에 가족을 두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보람이 없어졌다”며 “남은 시간에 대리운전이라도 뛰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신고리 5·6호기는 당초 2022년 10월 준공 예정이었지만, 공론화 과정과 주 52시간제 도입 여파로 준공이 2024년 6월로 연기됐다. 7월 말 기준 공정률은 47.72%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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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또 공사 중단 위기 최현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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