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산입니다. 멀기도 하거니와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탐방이 꺼려지는 곳입니다. 이제 무장공비는 없겠지만 대신 반달가슴곰이 나타날 수는 있으므로 혹시 몰라 스틱 하나쯤은 챙겨 들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라본 반야봉 쪽 풍경

지리산의 너른 품을 맘껏 탐사하지 못하다 보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도 지리산에 어떤 난초가 자라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지리산에 흰제비난초가 무더기로 피는 곳이 있다는 사실도 아주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 동호회 활동이 뜸하다 보니 식물의 자생지 소식에 둔감해져서 그렇기도 합니다.

대충 알아낸 정보를 갖고 찾아가 보기로 했는데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식물 찾느라 뜻하지 않은 고생을 하기 십상인지라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나 싶어 근무하시는 분께 슬쩍 여쭈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이 근처 습지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습지? 저분 따라가세요, 저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머리 희끗한 분이 장비를 챙기고 계셨습니다. 따라오라며 앞장서 가시기에 풍경 사진 찍다 말고 냉큼 따라갔습니다.

그분은 전날에 흰제비란 자생지를 찾아 헤맸다며 아직도 젖어 있는 등산화를 가리키셨습니다. 뒤늦게 찾기는 했는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해 하룻밤 자고 다시 오신 거라고 합니다.

저보다 먼저 와 헤맨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도 아마 지리산 숲 속을 헤매느라 등산화를 다 적셨을 게 분명합니다. 그분은 식물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는 부산의 고수셨습니다.

하지만 전국을 돌아다닌 고수면 뭐하느냐고, 여기에 흰제비란이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명색이 전문가라는 저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소속 동호회를 밝히며 닉네임까지 알려주시는데 저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알려드렸습니다.

"저는 혁이삼촌이라고 합니다."
"아, 어쩐지! 그런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했어요."

뜻밖에도 전에 저를 한두 번 본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2010년 봄 명지산에서 겨우 세 포기 남은 광릉요강꽃을 찍던 날에 동행한 분과 인사 나누셨던 분 같았습니다.

여쭤보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교환했습니다. 꽃과의 인연이 사람과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비좁고 척척한 길을 따라 얼마나 들어갔을까요? 혼자 왔다간 찾느라 고생했을 게 분명한 곳에 이르자 하얀 꽃 무더기가 나타났습니다. 왜 이제야 왔느냐며 조금씩 져가는 모습으로 맞아준 그것은 흰제비란이었습니다.

높은 산의 습지 주변에서 자라는 흰제비란은 자생지를 알기 어려워 만나기가 쉽지 않은 난초입니다. 전에 알던 강원도 양구군의 자생지는 펜스를 쳐놓아서 출입이 어려워졌다고 들었습니다.

흰제비란의 뿌리를 캐서 찍어볼 요량으로 지리산의 것을 찾아간 것이건만, 동행한 고수분이 오해할까 봐 이번에도 차마 캐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분 덕에 쉽게 찾기는 했으나 그분 때문에 캐보지 못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덤가에 피어난 흰제비란 군락
습기가 계속해서 제공되는 지리산 풍경

함께 사진을 찍는 내내 안개구름이 몰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수시로 습기를 공급해 주는 덕에 흰제비란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제비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잠자리가 심심찮게 날아와 좋은 피사체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흰제비란은 잠자리가 앉기 좋아하는 장대 같다

주위에는 닭의난초가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리산의 닭의난초는 높은 산에서 자라는 것이어서 그런지 키가 좀 작았습니다. 어미닭도 아니고 병아리도 아닌, 중닭 정도라고나 할까요?

이 닭의난초도 흰제비란처럼 습지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귀한 건 아니어서 곧잘 눈에 들어오는 편입니다. 보통 6월경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이곳 지리산 고지대의 닭의난초는 삼복더위에 맞춰서 피니 배짱도 참 좋습니다.

지리산 고지대의 닭의난초는 늦게 피고 키가 좀 작은 편이다

경기도 안산시 구봉도의 닭의난초 군락이 완전히 훼손된 모습에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최근에 남쪽의 어느 섬에서 엄청난 대군락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지고 있어서 놀랍습니다. 제발 그 모습이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리산 성삼재 등산로

장소를 옮겨 산을 오르다가 옥잠난초를 발견했습니다. 흔한 게 옥잠난초지만 작년에 만든 열매를 옆에 그대로 둔 채 새 꽃대를 올려 꽃 핀 모습이 예쁜 녀석이었습니다.

부산 고수 분께 찍으시라고 양보해 드리고는 나는 나중에 내려오다 찍어야지 하고 착한 마음씨를 선보였습니다. 아, 그런데 올라갈 때 잘 보였던 그 옥잠난초가 내려갈 때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눈을 레이더 삼아 계속 두리번거렸지만 스텔스라도 되는지 당최 찾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아까 올라갈 때 못 보았던 나도제비란이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리산에도 나도제비란이 자생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열매를 맺고 있는 지리산의 나도제비란

그 옥잠난초는 등산로를 몇 번이나 오르내린 후에야 겨우 찾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면서 아까 그 나도제비란의 열매를 정확하게 다시 찍어봐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제비란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그냥 하산해 버렸습니다.

지난해의 열매와 함께 피어난 옥잠난초

이렇게 난초들은 한 자리에 가만히 있건만 어쩔 때는 보이고 어쩔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작년에 열매 맺는 모습을 보았던 천마가 이번에 필 때가 되었기에 가본 것입니다.

부산의 고수 분과 함께 찾아보았으나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날이 너무 건조해 해거리를 하는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피어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캐간 것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식물을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제한적으로 쓰여야 한다고 노래 불러봅니다. 꽃이 맺어준 좋은 분들과의 인연을 새삼 돌아보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