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보복성 수출 규제 여파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 3종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며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가 이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정조준했다. 이번 규제에 포함된 소재 3종은 일본이 세계 시장 점유율 70~90%를 독점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업계에선 특히 일본 정부가 규제 대상에 포함한 포토레지스트(PR, 감광액)에 주목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중에서도 차세대 노광장비인 ‘EUV(극자외선·Extreme Ultra Violet)’용 제품을 규제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EUV 공정은 반도체 미세공정을 가능케 하는 차세대 핵심 기술이다. 일각에선 세계 반도체 업계 최초로 EUV 공정을 적용해 7나노 제품을 양산한 삼성전자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 규제에 포함된 제품은 일반 포토레지스트가 아니라 차세대 노광장비인 EUV용 포토레지스트다. 현재 D램(DRAM) 반도체 공정에 주로 사용하는 ‘ArF 레지스트’, 3D 낸드플래시 공정에 주로 사용하는 ‘KrF 레지스트’는 포함하지 않았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1위 목표 달성을 위해 삼성전자에 필수적인 EUV용 제품을 ‘콕’ 집어 규제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파운드리 부문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를 빠르게 추격 중이다. 지난 4월엔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 중 98조원을 파운드리 분야에 투자할 계획인데, 이 계획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바로 EUV 공정이다.
EUV 공정을 적용하면 반도체 회로 선폭을 줄일 수 있고 선폭이 좁을수록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파운드리 업체의 핵심 경쟁력인 미세공정에 유리한 것이다. EUV 기술을 토대로 삼성전자는 지난 4월에 선폭이 더 좁은 5나노 공정을 개발했다. 6나노 제품은 올해 내 양산을 목표로 이미 설계를 완성해 둔 상태다. EUV 공정을 앞세워 파운드리 세계 시장 1위 TSMC를 위협하던 차였다.
한데 이번 일본의 규제로 삼성전자의 EUV 공정에 비상등이 켜졌다. D램이나 낸드플래시 공정에 사용하는 포토레지스트는 국내 기업도 생산할 수 있지만, EUV용 레지스트는 첨단 기술 제품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버리고 차세대 공정에 필수적인 핵심 소재를 묶어버린 셈이다.
한국 기업이 자체적으로 EUV용 레지스트 개발·생산에 나선다고 해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EUV용 레지스트는 한국 기업이 아예 생산하지 못하는 제품"이라며 "규제가 장기화하면 삼성전자가 EUV 공정을 활용한 물량을 확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다만 아직까진 EUV 공정으로 생산하는 물량이 많지 않아 단기적인 피해는 적을 것으로 본다"며 "비싼 제품을 팔지 못하는 일본 기업도 답답할 것"이라고 했다.
자국의 첨단 기술력을 부각해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EUV가 한국 반도체의 미래 경쟁력이란 걸 알고 일본이 가장 아픈 카드를 꺼냈다는 것이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 정부가 현재 공정에 주력으로 사용하는 제품은 규제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며 "당장 생산에 차질을 주려고 했다기보다 자국 첨단 기술력을 부각해 정치 협상용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했다.
국내 기업이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물량은 △포토레지스터 2억9889만달러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6685만달러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1972만달러 등 총 3억8546만달러(약 4500억원)어치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의 차세대 성장 동력과 일본의 손실(수출액 4500억원)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산업 전체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