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외교 무능 무대책에 수출 유일 희망 반도체까지 흔들

입력 2019.07.01 11:52 | 수정 2019.07.01 14:21

삼성·SK하이닉스 재고, 1~2달 치
"소진 전까지 韓日 관계 해결 안 되면 공장 가동 중단 초유의 사태 올 수도"

"부품 수만개가 합쳐져 완성품이 만들어지듯 반도체도 마찬가지예요.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재료가 단 한 개라도 없으면 반도체는 못 만듭니다. 솔직히 미·중 무역전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일본 정부가 1일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꼭 필요한 핵심 소재에 대해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하자 국내 반도체 업계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며 이같이 입을 모았다. 국내 업체들은 전날 일본 언론의 수출 규제 보도가 나오면서 재고 조사, 대책 마련을 위해 내부적으로 논의하고는 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일본이 한국의 가장 핵심 산업인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를 정조준하고 있는데, 정부는 손 놓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이번 수출 규제는 비즈니스의 문제가 아닌 정치·외교 문제인데 기업들만 곤란해진 것"이라고 토로했다.

일본 정부의 이번 반도체 수출 규제 발표는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직후에 나왔다. 이번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행사를 마친 뒤 한국을 향한 보복 카드를 뽑아든 모양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 위안부 재단 해체 등이 겹치면서 깊어진 일본 정부의 감정의 골이 반도체 수출 규제 보복으로 나타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로 한국 법원에 의해 압류된 일본 기업들의 자산이 매각돼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해 왔다. 사법부의 판결을 문제 삼으며 한국 정부에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국 정부 역시 사태를 방치하며 대일 외교의 무능함과 무대책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6월 29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콘퍼런스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발표한 세 가지 품목에는 TV·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꼭 필요한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 가스)가 포함됐다. 리지스트는 반도체를 만들 때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 에칭 가스는 반도체 제조 공정 중 회로 모양대로 깎아내는 데 필요한 소재다.

특히 반도체 관련 화학제품의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의 일본 의존도가 90%에 달하기 때문에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여지도 있는 상황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D램의 75%, 낸드플래시의 50~60%를 차지하고 있는 두 회사의 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글로벌 메모리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재고 소진 때까지는 버티겠지만…

오는 4일부터 수출 규제가 본격화하면 한국 제조사들은 해당 품목 수입 때마다 일본 정부의 수출 허가,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 통상 90일가량이 소요된다. 국내 업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고는 1~2달 치 정도로 알려졌다. 이 안에 양국 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장 가동률 저하→공급량 감소→반도체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당분간 재고를 소진하며 공장 가동률을 낮추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겠지만, 당장 일본산을 대체할 국산 제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는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직원이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제품을 점검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반도체 업계에서는 에칭가스와 리지스트 모두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당장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에칭가스의 경우 부식성이 강하기 때문에 보관·제조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리지스트는 국산 제품보다 일본산이 기술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이를 당장 국산으로 대체하기가 더 어렵다고 전해졌다.

폴더블(화면이 접히는) 디스플레이용 투명 필름으로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역시 코오롱인더스트리, SKC 등이 생산하고는 있지만, 대량 양산까지는 아직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이달 중 출시할 것으로 전망되는 삼성전자의 첫 폴더블폰 ‘갤럭시 폴드’ 역시 일본 스미토모가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 품목의 한국 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우대 조치를 취해왔으나 한국을 우대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아예 시행령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한달여간 의견 수렴 기간을 거쳐 오는 8월 중 시행령을 개정할 예정이다.

◇일본의 자충수?

다만 시행령이 개정되기 전 어떻게든 양국 화해, 수출 규제 정상화가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반사이익은커녕 장기적으로 공급처를 뺏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에 경쟁할 만한 기업으로는 도시바, 샤프, JDI 등이 있지만, 이미 시장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라며 "또 이번 계기로 국내 업체들은 국산 소재 비중을 확대하는 시도를 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 소재 업체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 시장에서 한국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생산능력(CAPA) 기준 점유율은 각각 53%, 25%에 달한다. 일본 입장에서 한국은 소재 분야 최대 시장이라는 뜻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메모리를 넣어 PC, 스마트폰 등을 만드는 글로벌 IT 기업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조심스럽지만, 극단적 상황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며 "그전에 정부가 산업의 위기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시한폭탄 키워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 발표와 관련해 외교가에선 '결국 시한폭탄이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의 외교적 협의 요구에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며 구체적인 논의를 피했다. 그러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전, 상대측과 사전 교감도 없이 '한·일 기업 공동 기금 조성안'을 덜컥 내놓았다. 일본은 곧바로 거부했다. 이와 관련, 한국 정부가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무산된 책임을 일본에 지우기 위해 일본이 수용하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공동 기금 조성안을 제안한 것이란 비판이 일본 내에서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일본이 의장국으로 주최한 지난달 28~29일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은 약식 정상회담도 갖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두차례 악수했을 뿐이었다. 사실상 한·일 간에 감정의 골이 쌓일대로 쌓이면서 시한폭탄 시계가 임계점을 향해 다가가는데도 양국 정부는 감정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오사카 G20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페이스북에 "일본의 적극적 지지가 더해진다면 우리의 평화는 좀 더 빠르게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과 선린우호 관계를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문 대통령의 이런 의사표시를 일본 정부가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이번 반도체 수출 규제 발표로 확인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지난달 25일 국회 외교통일위 전체회의에서 '일본의 보복 조치가 우려된다'는 지적에 "일본의 보복 조치가 나온다면 (우리 정부도) 거기에 대해 가만있을 수는 없다"라며 강대강 대응을 예고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강경 대응을 예고한 만큼, 향후 한·일 갈등이 증폭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이러한 갈등 상황을 관리할만한 묘수가 한국 정부에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라고 했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이후 일본 정부는 대응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이고 있다"면서 "상당히 구체적인 대응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봉 위원은 "일본의 대응에 비해 한국 정부의 대응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땜질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면서 "향후 나올 일본의 '플랜 B' '플랜 C'를 어떻게 대처할 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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