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앞으로 20개월, 한국의 낙태 문화가 바뀐다

입력 2019.04.15 06:00

4월 11일,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합법적 낙태 시술이 시행된 지 100일째 된 날이다. 아일랜드는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국가로, 1861년 낙태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진 이후 낙태를 강력히 규제했다. 낙태를 한 사람은 최고 징역 14년형에 처해졌다. 임신한 여성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때 등 극소수 특수 상황에서만 낙태가 허용됐다.

그러나 지난해 5월 25일 국민투표에서 낙태를 금지한 헌법 조항이 폐지됐다. 유권자 64.13%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표가 66.40%, 금지해야 한다는 표가 33.60% 나왔다. 유권자 3분의 2가 낙태 찬성에 표를 던진 것이다. 2012년 사비타 할라파나바르라는 여성이 패혈증으로 유산 진단을 받은 후에도 태아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이유로 병원이 낙태 수술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사망하면서 낙태 금지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해 12월 20일 임신 12주까지는 이유 제한 없이 여성의 결정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됐다. 임신 12주가 지난 후에는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한 경우, 태아 기형으로 태아가 출생 이전이나 출생 후 28일 안에 사망할 가능성이 큰 경우에 낙태가 허용된다.

아일랜드에선 올해 1월 1일부터 의료기관에서 낙태 수술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참여하고 있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은 편이다. 임신 9주까지는 지역 보건소 등 1차 의료기관에서, 9주 이후에는 병원 산부인과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하도록 했는데, 현재 1차 의료기관의 10분의 1, 산부인과의 절반 정도만 낙태 시술에 동의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선 의료진의 ‘양심적 (낙태) 거부’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의료진 개인의 ‘종교적 양심’도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낙태 수술을 원하는 임신 여성을 아무런 조치 없이 돌려보낼 수는 없다. 다른 의사나 의료기관에 해당 여성을 연결해 줘야 한다.

4월 11일, 우리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한 여성과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임신 여성에게 낙태 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2017년 청구한 ‘낙태죄 사건’ 헌법소원심판에서 9명의 헌법재판관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이 단순위헌, 2명이 위헌 의견을 냈다.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했다. 헌재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입법자, 즉 국회가 법 조항을 개정하도록 했다.

다음 날인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신을 산부인과 의사로 소개한 여성이 ‘낙태 합법화가 되더라도 원하지 않는 의사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진료 거부권을 반드시 같이 달라’는 내용의 청원 글을 올렸다. 이 글은 14일 오후 10시 기준 1만5600여명이 동의했다.

의료진의 낙태 시술 거부권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20개월간 합의를 이뤄야 할 여러 과제 중 하나일 뿐이다. 헌재는 임신 22주를 낙태 허용 최대 기한으로 판단했다. 당장 낙태 허용 기한과 범위를 어느 수준으로 정할지부터 큰 논쟁이 예상된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대립의 시대는 끝났다. 헌재는 태아의 생명 보호는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다.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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