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자인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자금 관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국민연금이 갑자기 기업 경영진의 잘못을 단죄하는 기관이 돼 버린 것 같다."
27일 열린 대한항공(003490)정기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이 부결된 직후 재계의 한 관계자가 전한 소감이다.
이날 대한항공 주총에서 주주들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64.1%가 찬성했고 35.9%가 반대표를 던졌다. 대한항공 정관은 사내이사 선임은 참석 주주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때문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66.6%의 지지를 얻지 못한 조 회장은 사내이사로 재선임되는데 실패했다.
이번 주총 결정으로 조 회장은 대한항공 대표이사직도 잃게 됐다. 지난 1992년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지 27년만이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로 재선임되지 못한 데는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의 11.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전날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회의를 갖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는 것이 수탁자책임위가 제시한 이유였다.
◇ 전경련·경총 "연금 사회주의가 현실로" 개탄
국민연금이 국내 1위 국적항공사의 대표이사를 끌어내리는 초유의 일이 일어난데 대해 재계는 매우 유감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빈도가 부쩍 잦아진 국민연금이 실제로 최고경영자(CEO)의 경영권을 박탈한 첫번째 사례가 나왔다는 점에서 많은 기업들이 우려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입장문을 통해 "국민연금이 주주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고려해 신중한 판단을 내렸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것을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크다"며 "이번 결정은 사법부의 판결이 있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국민연금을 강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총은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한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었다"며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본질적 역할을 가진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국민연금, SK·기아차·신세계 등 이사 선임도 반대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의 이사나 감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진 것은 대한항공 뿐이 아니다. 올 들어 기아자동차와 현대건설(000720)과 효성(004800), 신세계(004170)등의 주총에서도 이사, 감사 선임안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다. 다만, 이들 기업에서는 표 대결에서 사측이 우세해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안이 그대로 통과됐다.
국민연금은 이날 대한항공 외에 SK(034730)와 신한금융지주 등 6개 기업의 사내이사, 사외이사 선임에 반대했다. 앞으로 주총이 열리는 동아에스티(170900), 동아쏘시오홀딩스(000640), KCC(002380)등에 대해서도 반대표 행사를 예고한 상태다.
예측하기 어려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총 의결권 행사를 통한 경영 개입에 대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오랜 기간 대주주를 중심으로 경영진을 구성해 여러 주요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해 온 국내 기업들은 향후 국민연금의 공격에 대비해 경영권 방어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부담이 커지게 됐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정권의 눈 밖에 나거나 경영 외적인 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기업에 대해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경영에 개입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며 "경기불황 등 여러 악재로 신음하는 기업들을 정부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