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총재 "디플레이션은 맞서 싸워야 할 괴물"
당장 경기침체 징후는 없지만 각국 선제적 대응
"낮은 인플레이션은 연방준비제도(Fed)가 인내심을 갖게하는 이유 중 하나다."(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유럽중앙은행(ECB)은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적용할 것이다."(마리오 드라기 ECB 의장)
저(低)물가가 세계 중앙은행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미 연준마저 올해 금리동결을 시사하면서 주요국의 통화정책 정상화 기조는 조기 종료되는 분위기다. 당장 경제지표가 경기침체를 나타내고는 있지 않지만 저물가는 만성적 저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올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대 초반에 머무는 저물가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목표치인 2%에 확연히 못미치는 수준이다. 고령화와 자동화 등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공급, 수요 측면이 모두 저물가로 향하는 흐름이다. 20년 장기불황을 겪은 일본과 다른 길을 가려는 우리나라로선 저물가에 대한 대응이 더욱 절실할 수 있다.
◇서서히 경제 잠식하는 '저물가'…美, 지표호조에도 연내 금리동결
저물가에 대한 우려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저물가는 국가경제를 서서히 잠식하는 독약과 같다. 물가는 한 국가의 총공급과 총수요 사이에서 형성되는데 공급보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이 올라가고 경기가 과열된다. 지금은 반대로 수요가 부족해 물가가 하락하는 측면이 크다.
저물가 환경에서는 기업투자가 줄면서 서서히 고용·임금이 감소한다. 개인들은 자산가치 하락을 전망하면서 지갑을 닫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몇 해 전 "디플레이션은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할 괴물(ogre)"로 표현한 이유도 그래서다.
미국 연준이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올해 금리동결과 함께 오는 9월 양적긴축 종료를 시사한 원인 중 하나도 물가의 흐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전년동월대비 1.50%에 그쳐 2016년 9월(1.50%) 이후 최저수준에 머물렀다. 지난해 7월만 해도 2.90%까지 올랐지만 연말쯤 1%에 진입한 뒤 하락세를 유지하고 있다.
연준이 선호하는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상승률도 작년 12월 1.9%를 기록, 목표치인 2%에 못 미쳤다. 미 연준이 "일자리는 탄탄(solid)하고 실업률은 낮은 상태를 유지했다"면서도 금리동결을 결정한 배경으로 지목된다. 연준은 이와 함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기존 2.3%에서 2.1%로, 물가(PCE) 전망치는 1.9%에서 1.8%로 낮췄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장 지표 자체가 꺾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저물가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보고 추후 경제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韓경제 디플레이션 우려도 '솔솔'…한은도 '저물가' 주목
저물가에 대한 우려는 우리 경제에서도 번져가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0.5% 상승하는데 머물러 두 달 연속 0%대를 기록했다. 저물가 추세는 올해도 지속될 전망이다. 한은은 지난해 10월 1.7%로 잡았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지난 1월 1.5%로 하향 조정했다.
수출둔화와 내수부진이 겹치면서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겹치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2017년 이후 우리나라 성장세를 이끌었던 반도체 수출이 지난 연말부터 마이너스로 꺾였고, 지난해 취업자 수 증가폭은 9만7000명으로 금융위기 후 최저수준을 나타냈다. 여기에 저물가가 수요측면에서 야기된다는 분석이 더해져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정부의 관리물가 상승억제, 유가하락 등이 공급측면에서 물가를 내리고 있지만 소비위축, 투자감소 등 수요측면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고령화로 소비 성향이 줄고 산업구조가 바뀌어 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저물가를 부르는 요인이다. 공급 변수를 제거하고 수요 측면을 볼 수 있는 근원인플레이션은 1%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디플레이션을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기둔화 속도는 세계경기 둔화보다 결코 느리지 않은 상황으로 수요 위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한은도 이미 저물가에 대한 주목도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달 금통위 의사록을 보면 대다수의 금통위원들이 저물가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한 위원은 "근원물가상승률이 장기간 1% 초반에 머무르고 있는 현상은 2018년 이후의 새로운 사건"이라며 "이 현상이 올해 중에도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돼 2% 물가상승률 목표제 아래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하는 정책담당자로서 우려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은은 지난달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서 언급한 것러럼 내달 물가상승률이 추가 하향조정할 가능성도 크다.
장보형 하나금융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사례처럼 저물가는 경기 우려에 대한 민감도를 높일 수 있는 요인"이라며 "통상 2% 수준은 나와야 안정적 경제성장이 이뤄진다고 하는데 구조적인 변화가 있는 만큼 이와 관련한 논의도 이뤄져야 할 걸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