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기로 놓인 '중형 조선소'…조선업 생태계 위험 경고

조선비즈
  • 한동희 기자
    입력 2019.03.14 11:32

    "정부나 채권단은 ‘빅3’처럼 큰 물고기에만 관심이 있어요. 중소형 조선사들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습니다. 작은 물고기는 죽어도 관심을 받기 어려우니까요."(중형 조선소 관계자)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힘을 합쳐 세계 시장 점유율 20% 이상의 ‘메가 조선소’를 탄생시킨 사이, 중형 조선회사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일감 절벽’에 시달리며 조선소가 텅텅 비었고, M&A(인수합병) 시장 매물로 나와도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

    경남 통영에 위치한 성동조선해양 조선소(왼쪽)와 진해에 위치한 STX조선해양 조선소(오른쪽)의 야드와 독이 텅텅 비어 있다./조선비즈DB
    중형 조선사들은 생존에 필요한 수주를 위해 ‘RG(선수금환급보증)’ 발급이 시급하지만, 정부 정책과 은행간 ‘온도차’로 손발이 묶인 상황이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할 경우 은행이 선주사에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는 지급 보증이다. RG 발급이 안 되면 선박 수주 계약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중형 조선소가 사라지면 중소형 선박 시장을 중국·일본·동남아시아에 뺏길 것"이라며 "한국 조선업 생태계가 무너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 중형 조선소 5곳 모두 생사 기로

    14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중형 조선소 수주량은 54만7000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로 2017년보다 18% 줄었다. 수주금액도 13.6% 감소한 10억8000만달러(약 1조2189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4분기와 올 1분기 통들어 수주건수가 있는 중형조선소는 대한조선과 대선조선 2곳에 불과했다. 중형 조선사의 지난해 국내 시장 점유율(수주액 기준)은 4%에 불과, 2006년(10.0%)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국내 5대 중형 조선소 중 하나인 한진중공업은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지난 1월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완전자본잠식은 자본금을 모두 소진해 회사에 빚만 남은 상태를 의미한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6874억원 규모의 출자 전환을 확정, 회사의 최대주주가 기존 한진중공업홀딩스에서 산업은행으로 바뀌게 됐다.

    성동조선해양은 매각이 두차례 불발되면서 다음달 3차 매각을 시도할 계획이다. 대선조선 역시 지난해 매각을 시도했지만, 가격 조건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실패했다. STX조선해양은 피나는 회생계획안을 이행 중이다. 중형 조선소 중 가장 실적이 좋은 대한조선은 최대주주인 대우조선해양(지분 67.7% 보유) 매각에서 배제되면서 ‘홀로서기’에 나서야 한다.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2000년대 후반까지 초호황을 누렸다. 선박 수요가 급증하고 용선료가 폭등하자 선박 발주가 쏟아졌다. 조선업계는 앞다퉈 설비 증설에 나섰다. 거품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터졌다. 선박 가격이 폭락하고 수주량이 급감했다. 수주 절벽에 몰린 국내 중형 조선사들은 저가 수주에 목을 맸다. 출혈 경쟁에 따른 수익 악화를 견디지 못한 성동조선, STX조선 등은 채권단에 운명을 맡기게 됐다.

    ◇ 정부 정책 유명무실…현장 목소리와 온도차

    조선업계는 중형 조선소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유로 정부 정책을 꼽는다. 빅3 업체들에 정책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중형 회사의 실정에 맞지 않는 지원책이 나오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용휘 마스텍중공업 대표와 정미경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의 조선소 지원방안에서 전체 예산(7조원) 중 2025년까지 중형조선업에 유입 가능한 지원은 총 4000억원에 불과하다. 총 예산의 5.7%만이 중형 조선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업계는 정부의 금융지원책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다. 정부는 금융기관이 중형 조선사에 RG를 발급할 때 정책금융기관이 보증하는 RG 보증 지원액을 10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시장 전망을 감안할 때 턱없이 부족한 규모라는 지적다. 정미경 교수는 "수주절벽으로 RG 발급 최저점을 기록한 2016년에도 중형 조선 RG 발급액이 6000억원, 중소형 조선의 경우 823억원에 달했다"며 "2500억원의 대손충당금을 조선산업 활력제고 방안의 예산에 포함시켜 약 5조 규모의 RG 발급이 가능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가 RG 발급 완화를 위해 시중은행의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대책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종식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은 "조선소 운영을 위해 적자 수주가 아니라면 이윤이 거의 없더라도 RG 발급을 해줄 필요가 있다"며 "중형 조선업체들이 사라지면 중소형 선박 시장에서 중국 조선업체들이 추격해 조선업 생태계가 위험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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